홍상수 감독의 22번째 장편 <풀잎들>은 여전히 솔직한, 현재 진행 중인 영화입니다. 과함을 걷어내고 직설적인 언어로 농밀한 66분입니다. 등장인물들은 맡은 바를 충실히 해냈고, 최소한의 동선으로 지적이고 마음씨 좋은 주인장의 카페에서 마법 같은 시간을 만듭니다.
후미진 골목 안 작은 카페. 이곳은 작가, 배우를 꿈꾸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카페는 이들을 모으는 역할이자, 아름(김민희)의 이야기 공작소입니다. 작가가 아니지만 무언가를 끄적이는 아름은 손님들 대화를 엿듣고 자신만의 생각을 글로 적어냅니다. 일종의 관찰과 관음, 창작의 공간을 활용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삶과 죽음, 관계를 엮는 화자이자 청자죠. 이렇듯 장소는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눈치챘겠지만 영화 속의 등장인물은 감독의 여러 분신입니다. 단단히 화가 나 보이는 카페 안 미나(공민정)는 홍수(안재홍)에게 잘 살고 있냐고 반문합니다. 승희가 죽은 것은 다 너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남자 때문에 한 여자가 죽었고 유명한 배우인 남자가 앞으로 아무렇지 않게 살아갈 수 있을까 질문을 미나를 통해 던집니다. 생각 없이 뱉은 말과 행동은 누군가에게는 치명적인 흉기가 될 수 있음을 비유하고 있는 듯 합니다.
또 다른 남녀가 있습니다. 남자는 한 물 간 배우(기주봉)입니다. 작가인 여자(서영화)를 오랜만에 만났고 염치 불고하고 여자의 집에 얹혀살고자 합니다. 젊은 사람에게 의지하고 싶은 건지 끈질기게 구애하지만 거절당합니다.
밖에 앉아 있던 배우 경수(정진영)는 시나리오를 쓰고 있습니다. 어릴 적 꿈이 감독이지만 배우의 삶을 살며 새로운 자극을 받고자 쓰고 있죠. 후배 작가(김새벽)에게 공동 작업을 제안하지만 거절당합니다. 거절한 작가는 남과 자신의 생각을 섞는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라며 충고합니다.
아름의 동생 진호(신석호)와 여자친구 연주(안선영)가 만나는 밥집의 손님 순영(이유영)과 뒷모습의 남자(김명수)는 배우나 작가가 아니지만 사랑 때문에 만난 관계입니다. 사연 있어 보이는 둘은 한 남자의 죽음으로 얽혀있죠. 여자는 우리는 사랑했을 뿐이라고 말하고 남자는 최 교수의 죽음이 당신 때문이라 힐난합니다. 누군가에게 사랑은 이토록 열정적이고 충동적인 감정으로 다가온다는 것을요.
동생 커플에게 첫 만남부터 누나 아름은 결혼을 생각하고 만나냐고 묻습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잘 모르면서 결혼하고 그렇게 살아가는 줄 아냐며, 진심이 없다고 한탄하죠. 겉모습에 현혹된 얕은 관계보다 진솔한 대화와 만남이 있어야만 가능한 관계의 정의를 이야기합니다.
카페 밖 새싹이 돋아난 고무대야는 이들의 대화처럼 살아 있습니다. 대화를 엿듣지만 합류하고 싶지 않아하던 아름을 끌어들이는 이야기의 마력은 무엇일까요? 각자의 이유로 모였지만 결국 섞이고마는 인생을 대야 속 풀잎들로 보여줍니다.
영화 <풀잎들>은서정적으로 시작해 점점 고조되다 클라이맥스를 찍으며 끝나는 클래식 한 곡을 듣는 느낌입니다. 영화는 클래식의 구성에 빗댄 연결된 카르마죠. 홍상수 감독은 아마도 가공하지 않아 담백한 본인의 이야기를 가장 잘 할 줄 아는 몇 안 되는 감독일겁니다. 조금은 독특하나 어딘가에는 있을법한 인물들은 순환하는 우리들의 삶과도 닮았습니다.
평점: ★★★
한 줄 평: 클래식의 구성에 빗댄 연결된 카르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