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장혜령 Mar 28. 2021

<크레이머 대 크레이머> 42년 전 이혼 이야기의 공감


자기 애를 버리려면 용기가 얼마큼 필요하지?

광고 회사에 다니는 워커홀릭 테드(더스틴 호프만)는 공들였던 프로젝트가 성공을 거두며 승진을 코앞에 두고 있다. 오늘을 기념하고 싶어 잔뜩 들뜬 기분으로 퇴근해 집에 왔지만 아내 조안나(메릴 스트립)는 느닷없이 떠나겠다고 선언한다. 무슨 일인가 상황 파악해 보려는 것도 잠시, 조안나는 지난 결혼 생활이 무의미했다며 자아를 찾아가고 싶다고 말하고는 떠나버렸다. 

테드는 가끔 왔다가는 우울증이겠거니 단순하게 생각했다. 분명 곱게 싸놓은 짐도 가지고 나가지 않았으니 멀리 가지 못했을 것이고 화가 풀리면 금방 돌아올 거로 생각했다. 아내는 화가 나면 말수가 급격히 줄어든다. 최근 회사일이 바빠 가족과 시간을 보내지 못했지만 다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서였노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테드는 정말 성실히 일했고 돈을 벌어 조안나와 빌리(저스틴 헨리)를 행복하게 해주는 게 가장이 할 일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하지만 앞만 보고 달리는 사이 가족들은 뒤따라오지 못하고 낙오되었다. 미처 넘어지고 뒤처졌는지도 알아차리지 못한 채 계속 달리기만 했음을 깨닫는다.    

영화 <크레이머 대 크레이머> 스틸

아내이자 엄마가 없는 첫날. 가사와 육아를 전적으로 맡아하던 전업주부 조안나의 빈자리는 생각보다 컸다. 일어나 아침 먹이는 것부터 쉽지 않다. 프렌치토스트를 먹고 싶다는 말에 계란을 깨고 식빵을 굽는 것부터 난관이다. 하마터면 큰일 날뻔한 위험한 순간이 연출되고 우여곡절 끝에 등원을 시켰다. 헐레벌떡 출근했지만 클라이언트와의 회의에 지각하고 정신없이 일하다 보니 벌써 하원 시간이다. 빌리를 데리러 가는 시간도 늦었더니 벌써 입이 대발 나와있다. 어르고 달래 집에 와서 저녁먹이고 씻기고 잠자리에 들기 전에 동화책도 읽어주고 재우다 보면 하루 24시간이 모자라다.    


정신없는 18개월을 보내는 동안 조안나는 편지 한 통을 보냈을 뿐이다. 엄마가 자기를 버리고 갔다는 사실에 풀 죽어 있었던 빌리도 차츰 안정되었다. 부자(父子)는 어렵사리 적응해나갔고, 조안나의 친구였던 마가렛(제인 알렉산더)과 친구가 되며 한가로운 오후를 보내던 중이었다. 놀이터 정글짐에서 놀던 빌리가 잠시 한눈 판 사이 떨어져 얼굴을 크게 다치고 혼비백산해 응급실에 뛰어간 테드는 자기 잘못인 양 자책하기에 이른다. 하지만 부자의 살얼음판을 걷는 듯한 고군분투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드디어 조안나가 돌아왔다. 버리고 갈 때는 언제도 이제 와서 빌리를 데려가겠다고 나서는 초유의 사태를 맞이한다.     

영화 <크레이머 대 크레이머> 스틸

어이없는 테드는 단박에 거절하고, 이럴 줄 알았다며 양육권 소송을 준비하는 것에 맞서 테드도 변호사를 구했다. 양육권은 전적으로 엄마에게 승산이 있지만 떠난 쪽도 엄마이기 때문에 해볼 만한 분쟁이었다. 게다가 조안나는 스스로 불안한 정신 상태로 빌리를 데려갈 수 없었다고 스스로 고백했다. 더더욱 전적으로 아빠 테드가 키우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 무엇보다도 아이가 이리저리 옮겨 다니며 적응해야 하는 시간도 무시할 수 없기에 전적으로 빌리를 위해서 최선을 다하겠다 다짐했다.    


하지만 재판을 준비하면 할수록 그동안 조안나가 혼자 겪어야 했던 일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갔다. 아무리 바쁘더라도 가족이란 이름으로 묶인 팀원 하나하나를 세세하게 살펴보지 못했다는 미안함, 가장으로서 돈만 벌어주었지 좋은 아빠, 남편 인적 없었다는 사실도 깨닫는다. 무엇보다 결혼과 출산으로 갑작스러운 경력단절을 겪어야만 했던 조안나의 심정을 헤아려 주지 못했다는 반성도 커진다. 재판은 역시나 예상했던 대로 엄마에게 유리한 쪽으로 기울었고, 테드는 빌리와 작별 인사를 해야 할 때가 온다.    


빌리와 맞이하는 마지막 날 아침. 조안나가 떠난 아침과 데칼코마니처럼 닮은 프렌치토스트 요리 장면이 연출된다. 첫 장면과 대조적으로 능숙하게 달걀을 깨고 풀어 담그기까지 손발이 척척 맞는 부자지간의 티키타카가 인상적이다. 영화의 전반부는 조안나가 떠난 빈자리를 테드와 빌리가 서투르게 채워가는 따뜻함이 깔려 있다.

영화 <크레이머 대 크레이머> 스틸

하지만 "엄마는 여전히 너를 사랑해"라고 말하고 사라진 조안나가 재등장한 후반부의 법정 장면은 말도 못 하게 차갑다. 서로의 잘못을 들추며 할퀴는 시간 속에서 지난 8년간의 결혼 생활은 산산이 조각나고 부정하며 무의미한 시간으로 치부해 버린다.     


1979년 제작돼 우리나라에 1980년에 개봉한 로버트 벤튼 감독의 영화는 40여 년이 지난 지금 봐도 전혀 어색하지 않은 기시감에 놀랄 수밖에 없다. 고학력 전문직 여성의 결혼과 출산, 그리고 독박 육아와 경력단절, 전통적인 여성상과 독립적인 자아의 충돌을 이야기한다. 영화 속 배경은 페미니즘 붐이 일어나기도 했던 70년 대 후반, 엄마가 어린 자식을 떼어 놓고 나올 만큼의 일생일대 결정이었다. 아이를 사랑으로 키우고 가정에 헌신해온 8년의 세월 동안 나는 누구인지 무엇을 하며 살아왔는지 자꾸만 공허해진다.    

영화 <크레이머 대 크레이머> 스틸

이 영화는 2019년 넷플릭스를 통해 공개된 노아 바움백의 <결혼 이야기>에 앞선 선배 격 결혼 드라마다. <결혼 이야기>가 사랑해서 결혼했지만 서서히 소원해지는 감정과 결혼과 이혼에 관한 성찰, 여성의 자립을 전했던 명작이다. <결혼 이야기>가 노아 바움백, 스칼렛 요한슨, 로라 던의 이혼 경험이 적극 반영된 풍부한 시나리오였다면, <크레이머 대 크레이머>에서 조안나의 법정 증언 대사의 일부를 메릴 스트립의 경험담에 맞게 각색된 유일한 부분이라 전해진다. 이렇게 영화는 제52회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 작품상, 감독상, 각색상, 남우조연상, 여우조연상을 휩쓸었다. 

평점: ★★★★★

한줄평: 지금봐도 달라린 게 없는 현실

매거진의 이전글 <고질라 vs 콩> 59 년 만의 빅매치 성사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