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란 안 홍' 감독의 장편데뷔작
2018 서울국제영화제 클래식 레시피 <그린 파파야 향기>를 보았습니다. 90년대 당시 카메라를 정면 응시하는 소녀의 모습의 포스터가 많은 카페나 방안에 걸려있었던 때가 있었는데요. 당시엔 보지 못했고 말로만 듣던 고전을 이번에 극장으로 관람하게 되었죠.
영화 <그린 파파야 향기>는 극강의 비주얼리스트 '트란 안 홍' 감독의 장편 데뷔작입니다. 1993년 칸영화제 황금카메라상, 세자르 신인감독상을 수상, 아카데미 외국어 영화상 후보에 올라 국제적 명성을 얻은 작품입니다.
그는 베트남 다낭 출신이지만 10대를 프랑스에서 보내며 유럽 정서의 아시안 영화를 만들었는데요. 대표작으로는 <씨클로>, <상실의 시대>, <나는 비와 함께 간다>, 최근 <이터너티>까지 독특한 필모그래피를 쌓아왔습니다. 또한 <그린 파파야 향기>의 무이 역의 '트란 누 엔 케'와 결혼했으며, 이름다운 영상과 귀르가즘, 촉각이 느껴지는 비주얼리스트로 유명합니다.
때는 1950년대 베트남. 열 살배기 소녀 '무이'는 도시의 하녀로 일하게 됩니다. 가진 것도 없고, 글도 모르지만 무이의 삶은 하나도 가난하지 않습니다.
밤마다 들리는 귀뚜라미, 풀벌레 소리, 아침마다 음악처럼 들리는 새소리. 그린 파파야에서 흘러나오는 하얀 진액과 보기만 해도 흰쌀같이 배부른 파파야 속, 흐르는 빗물, 무심한 듯 지나가는 두꺼비와 도마뱀 등. 지친 노동은 일상과 자연의 아름다움에서 위로받습니다. 오히려 무책임한 가장으로 고통받는 주인집 식구들을 목격하며 관객의 마음을 흔들어 놓죠.
영화는 어린 무이와 성인 무이의 두 섹션으로 나뉘어 있습니다. 10년 후 주인집의 가세가 기울자 무이는 주인집 큰아들의 친구였던 작곡가 쿠엔의 집에서 일하게 됩니다. 어릴 적 염모해왔던 쿠엔이지만 쿠엔의 마음을 알길 없던 무이는 서서히 그와 함께하며 아름다움과 마음을 알아갑니다.
<그린 파파야 향기>의 전체적인 스타일은 대사가 많지 않기 때문에 소리와 영상에 집중할 수밖에 없습니다. 창문으로 지켜보는 듯한 시선이 관음과 관찰의 동시에 느낄 수 있습니다. 순수한 표정과 미묘한 행동, 기본적인 서사가 무너진 꿈속을 유영하고 있는 득한 몽환적인 분위기가 매력입니다. 병적이라고 생각될 만큼 잦은 클로즈업과 움직이지 않는 카메라는 집요하게 인물, 자연, 빛, 공기마저 스크린에 담습니다.
그래서인지 덥고 습한 베트남의 공기를 식혀줄 사방이 뚫린 창과 캐노피로 시원함과 은밀함을 동시에 갖습니다. 반면 실내에서 거의 모든 일상이 펼쳐져 답답한 감이 들다는 것, 대사가 많이 없이 영상과 표정, 은유적 시선을 이해해야 하는 정적인 영화입니다. 예쁜 포스터와 감독의 명성에 골랐다면 어쩌면 깊은 잠의 세계로 초대할지도 모릅니다.
트란 안 홍' 감독은 순수한 무이를 앞세워 컬러풀한 색채감과 탐미적인 영상을 가장 아름답게 구현하는 색감 장인입니다. 또한 드뷔시 '달빛'의 원조 스타일을 탐미할 기회였죠. 프랑스 작곡자 드뷔시는 인상주의 음악의 창시자입니다. 그만큼 영화에서 보여주는 초록과 빛의 세계와 가장 잘 어울리는 선곡이라 할 수 있죠.
아름다운 선율의 드뷔시의 '달빛'은 <트와일라잇>ost로 각인되었는데요. 이보다 앞서 멋진 비주얼로 쓰였고, 또 한 번 <이터너티>에서 유럽 버전의 판타지를 선사해 주었습니다.
영화를 보고 나면 자꾸만 초록 식물 사이사이의 풀벌레 소리가 아른거립니다. 녹색의 정원과 피아노 선율, 잘 익은그린 파파야를 따서 독특한 방식으로 채를 치는 모습이 인상적입니다. 그린 파파야를 먹어본 적도 냄새를 맡아 본 적도 없지만, 화면에서 표현되는 하얀 진액에서 향기가 느껴지는 듯합니다. 영화는 이렇듯 시각으로 보여주는 오감만족의 총채라 할 수 있겠네요.
평점: ★★★☆
한 줄 평: 초록의 매혹, 끈적하고 후텁지근한 기후도 없애줄 청량한 기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