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년대 평화시장에는 학교에 가는 대신 가족의 생계를 위해 미싱을 타는 소녀들이 많았다. 말도 안 되는 낮은 시급과 근무시간, 건강을 해치는 열악한 환경에서도 열심히만 하면 돈 벌 수 있다고 생각한 소녀들은 '시다', 혹은 '공순이'로 불리며 학교 대신 평화시장으로 출근했다. 이들은 힘들 때면 잠시 몸을 기대고 어려울 때면 내 일처럼 나서 단결했다. 함께 노동요를 부르고 못다 한 공부를 도와가면서 보이지 않는 미래를 키워갔다.
근로기준법을 외치던 전태일 열사의 항거 이후 일 변화의 움직임이 일었다. 십시일반 모아 조합을 만들고 노동 교실 열었지만, 정부로부터 지속적인 감시와 와해를 요구받는다. 배움에 목말랐던 어린 여성 노동자들은 밥보다 더 좋은 '노동 교실'을 지키고 싶었던 열망이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1977년 9월 9일 노동 교실 철거 하루 전 결단을 내리게 된다. 유일한 희망을 지키기 위해 농성을 벌이며 맞섰지만 이내 좌초된다. 북한의 구구절을 뜻하냐는 어이없는 이유로 빨갱이로 몰려 모진 징역살이를 겪었다. 여성들은 차디찬 감옥에서 차별과 멸시를 받으며 견뎠다. 여기까지가 어디에도 기록되지 않았던 77년 9월 9일의 진실이다.
공부 대신 미싱을 탈 수밖에 없었던 언니들
영화는 45년 된 사건을 회상하는 14명의 중년 여성들의 인터뷰를 통해 당시 상황을 듣는데 할애한다. 이제는 지긋한 50.60대 중년이 된 여성들이 당시를 추억하며 읊조린다. 항상 억눌려 있던 소녀들은 제2의 전태일은 여성이어야 한다는 사명감에 불타올랐다. 지금은 웃으면서 이야기하지만 아직 아물지 않은 상처를 들춰내는 작업은 쉽지 않은 시도였을 것이다.
2018년 서울시 봉제 역사관 디지털 영상 아카이빙 작업으로 진행한 봉제 노동자 32인의 구술생애사 인터뷰에서 출발했다. 잘 알려져 있는 역사보다는 개인의 삶에 초점을 맞췄다. 무엇보다도 어린 여성 노동자들의 삶이 기록되어 있지 않았다는 점이 계기였다. 고작 12살에서 16살 밖에 되지 않은 고사리 같은 손으로 미싱을 돌리고 무릎도 펴지 못한 채 한 자세로 열 시간 넘게 일해야 했던 부당한 근무 환경의 고발도 이어진다.
당시 찍었던 야유회 사진, 일하는 사진, 주고받았던 편지 등이 가끔 등장할 뿐 오히려 과거를 재현하지 않는 점이 담백하다. 화려한 편집이나 자료 화면, 음악은 배제하고 생생한 목소리로 야만의 역사를 묵묵히 듣는다. 이게 바로 아픔의 시대를 겪은 여성들을 위한 최소한의 위로와 배려가 아닐까. 그녀들의 애환과 억울했던 사연을 같이 듣고 향유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세대 교육임을 깨닫게 된다.
또래 친구들이 학교 갈 때 공장으로 출근했고, 청소년인지만 교복을 입고 있지 않았다는 이유로 성인 요금을 내야 했던 일화, 여자가 공부해서 뭐 하냐는 아버지의 말에 복종할 수밖에 없던 지난날이 주마등처럼 스쳐 간다. 어디서 그런 힘이 나온 걸까. 대한민국에서 가장 힘없고 가난하고 가여운 소녀들에게 역사는 가혹해도 너무 가혹했다. 서슬 퍼런 공권력에 대항에 또박또박 말하고 몸을 던지던 기개는 '배우고 싶다'라는 열망에서 시작된 초인적인 힘이었을 것이다.
청춘의 나와 대면할 때의 뭉클함
영화의 하이라이트는 눈부시던 그때의 나와 마주했을 때다. 젊은 나를 어루만지며 눈시울을 붉히는가 하면, 참 열심히 잘 견뎠다는 자신을 향한 칭찬의 말을 꺼내는 모습은 먹먹함을 자아낸다. 혹시 자식들에게 해가 될까 비밀처럼 꼭꼭 숨겨왔던 과거를 밝혀 소통의 주제로 삼는 자매애는 공동체 의식이 사라진 때 단결의 힘을 몸소 말해준다.
무슨 일인지도 잘 모르고 정의를 위해 해야만 한다고 생각한 그때의 나와의 교감은 눈시울을 붉히게 한다. 젊음과 아름다웠던 청춘을 바치면서까지 무언가를 지키겠노라며 싸운 신념은 사라져 가는 정의를 향해 질문을 던진다.
<미싱타는 여자들>은 어쩌면 살면서 놓치고 있는 것, 잃어버린 것을 환기하는 작업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누구의 언니, 누나, 친구, 동료, 엄마였을 여성들을 카메라 앞에 세워 이름 불러 준다. 누구도 주목하지 않았던 7번 시다, 1번 미싱사로 불렸던 때. 당당히 자신의 이름을 불러준 동료, 선배를 향한 애정도 전해진다.
그동안 잘 드러나지 않았던 평화시장의 수많은 여성 노동자의 한과 분노, 사랑이 영화 속에 꾹꾹 담겨있어 밀도 높은 감동을 전한다. 그 시대를 공순이로 살았던 여성, 공장이 아닌 학교를 다녔던 여성, 청춘을 그리워하는 여성, 현시대를 살아가는 젊은 여성 모두가 이해할 수 있는 감성은 세대를 아우르는 마력을 품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