컴퓨터 화면을 가득 메운 기사 속 한 줄.
"우는 아이를 보았을 때, 반응하는 MBTI별 반응"
- 혼자 있게 내버려둠
- 어색하게 곁에 있어 줌
- 위로해 줌
- 같이 울어 줌
- 울고 있는 원인을 찾아내려 함.
- 그 원인
그 아래 나열된 문장들 중,
내 시선을 멈추게 한 건 마지막이었다.
"울고 있는 원인을 찾아내려 함."
순간, 웃음이 터졌다.
“바로 난데?”라는 인정과 함께,
며칠 전의 내가 불현듯 떠올라서였다.
그러나 그 웃음은 결코 가볍지 않았다.
‘그 원인’이 아니라 다행이라는 안도와,
그러면서도 피할 수 없이 나를 닮아 있는 불편한 진실.
"지나야, 엄마가 그렇다네."
가볍게 장난처럼 건넨 말에
딸의 대답은 뜻밖에도 진지했다.
“그러니, 내가 엄마랑 살면서 얼마나 힘들었겠어.”
가벼운 웃음을 기대했건만,
그 아이는 웃지 않았다.
나는 먼저 화를 내고,
쉽게 풀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그럴 때마다 늘,
딸이 먼저 다가와 화해를 청했다.
그래서 나는 아이가 나보다 훨씬 더 착하고,
더 넓은 마음을 지녔다고 믿었다.
그러면서도,
끝내 먼저 다가가지 못하는 나를 고치지 못했다.
그 아이는 이제 엄마가 되었고,
나는 힘이 빠진 할머니가 되었다.
교육심리학을 전공한 나는
사람을 16가지 유형으로 가른다는 MBTI를
쉽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백 명의 사람에게는 백 가지 빛깔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
오랜 내 신념이었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나는 점점 ENTJ라는 이름으로 나를 설명하게 되었다.
그 이름으로 과거를 다시 해석했고,
내 삶을 다른 각도에서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침내,
1.3%라는 숫자에 주목했다.
98.7%의 시선으로 1.3%를 바라보는 삶.
그 안에서 나는 힘들었고, 또 누군가를 힘들게도 했다.
힘들었고, 힘들게 했던 시간 그 모든 순간.
그들은 어떤 마음으로 내 곁에 있었을까.
나는 ENTJ 성향의 여자다.
살아남기 위해 익힌 ‘순응’의 기술.
일과 삶을 주도하며 걸어온
'나쁜 여자, 나쁜 엄마'의 고단했던 시간.
그리고 은퇴 후에야
비로소 들여다보게 된 내면의 감정들.
이 시간 나는 조용한 서사로 삶의 궤적을 따라가 본다.
ENTJ 성향의 여자는
그림으로, 글로, 사진으로 나의 흔적을 남겨왔다.
그 안엔 선택받지 못한 유년의 단절감,
삶을 치열하게 계획하며 살아낸 흔적,
그리고 이제야 겨우 마주한 ‘나’라는 존재가 있다.
사건보다 풍경이, 이야기보다 감정이 중심이었던 시간들.
조용하지만 진심 어린 기록.
나는 그 기록 속에 작은 조각 하나를 놓고 싶다.
느릴지라도 진실한 모습으로
나는 선택되지 않고 선택하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