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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둥리지 Oct 30. 2024

"꼬부랑 세운 동명왕, 백제 온조왕"

마치 틀린 가사가 이 아이의 순수한 시절을 상징하기라도 하듯.

  아이의 세계는 줄곧 현실과 상상이 섞여 있는 곳이었다. “엄마, 내가 사실 이천 년 전에 공룡이랑 같이 살았었는데 말이야” 하고 운을 떼는 아이 앞에서 애써 웃음을 참아야 했다. 


  그랬던 그 아이의 입에서 이 노래가 처음 흘러나오던 순간을 나는 기억한다.


아름다운 이 땅에 금수강산에

  작고 동그란 입술로 ‘금수강산’과 ‘홍익인간’을 논하는 것이 기특하다 못해 이질적이기까지 해서 몇 번을 더 들여다본다. 드문드문 기억나는 이름을 그러모아 노래하느라 제 엄마의 놀란 표정을 알아채지 못한 채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노래를 이어가는 아이. 

  너는 어느덧 자라 이 노래에까지 왔구나. 봄에는 꽃을, 가을에는 낙엽을 노래하던 너의 세상이 이만큼 넓어지고 또 멀어졌구나. 


  아이는 위인들의 정확한 이름을 묻고 또 묻는다. 기어이 발음은 했다만 도통 이해되지 않는 사실들을 이해하고 싶어 제 아빠를 괴롭힌다. 일곱 글자의 노랫말에 납작하게 압축되어 있던 위인들의 삶을 이해하기 시작한 아이의 눈에서는 빛이 난다. 혜초는 사람이었고 천축국은 나라였다는 걸 알게 된 아이는 신이 나 들썩거린다. 




  하지만 이 노래의 압권은 따로 있다. 몇 번을 들어도, 다 알고 들어도 속수무책으로 당하고야 마는 부분. “꼬부랑 세운 동명왕, 백제 온조왕”이 바로 문제의 가사가 되겠다. 어느 집에는 ‘당근 할아버지’가 오셨다고 하고, 또 어떤 집에는 ‘발목 자른 김유신’이 오기도 했다는데 우리 집 다섯 살 아이는 매일 ‘꼬부랑’을 세우고 있다. 진지한 표정으로 노래하는 아이를 앞에 두고 웃는 것이 예의가 아닌 듯싶어 "꼬부랑이 아니고 고구려야" 하며 끼어 들까 생각한 적도 있었으나, 글자를 읽기 시작한 아이이니 제 실수를 알아 차릴 날도 얼마 안 남았을 것이라는 생각에 말을 삼킨다. 마치 틀린 가사가 이 아이의 순수한 시절을 상징하기라도 하듯.


  그리고 나는 생각한다. 네가 상상력과 순수함을 고이 접어두고 이 세계에 넘어오기까지, 아무래도 시간이 조금은 더 걸릴 것 같아 다행이라고. 그동안 우리는 우리가 함께 할 수 있는 일들을 찾아보자고.


  그렇게 우리 가족의 가을 나들이가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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