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세 만세 유관순'에 빠진 아이와 함께한 어느 가을날의 가족 여행
*이 글은 이전 글인 <꼬부랑 세운 동명왕, 백제 온조왕>의 후속 글입니다.
단풍이 예쁜 계절이 오면 독립기념관에 가야 한다고 알려준 사람은 남편이었다.
6년 전, 그러니까 두 아이의 아빠가 ‘오빠’였던 시절, 그는 혼자만 아는 비밀이라도 되는 듯 나에게 천안의 가을을 이야기했다. 그 동네가 예쁜 것을 너는 어찌 아느냐며 나는 눈을 조금 흘기면서도 머릿속 지도에 독립기념관을 저장해 두었더랬다.
그 후로 우리에게 몇 번의 가을이 있었으나 훌훌 떠나는 건 쉽지 않았다. 이유는 많았다. 가을인데 여전히 너무 더워서, 가을이라 아침저녁으로 추운 걸 보니 아이 아프기 딱 좋을 날씨 같아서, 가을에는 단풍 구경으로 어딜 가든 사람이 많을 거라서.
그랬던 우리 가족이 드디어 천안의 가을을 맛보게 되었으니. 우리를 움직이게 한 장본인은 다름 아닌 첫째 아이였다.
'만세 만세 유관순' 만나려면
서대문에 가야 해?
진도대로라면 아이는 고려 시대의 위인을 공부해야 했다. 그러나 어떤 연유에서였는지 아이는 유독 노래 후반부의 ‘만세 만세 유관순’과 ‘못살겠다 홍경래’를 자주 읊조렸다.
아이의 관심사를 확장해주고 싶은 마음에 유관순 열사의 생애를 다룬 책을 빌려다 주었고 아이는 그 속에서 서대문 일대를 뛰어다니며 독립운동을 하는 유관순 열사를 만났다. 그리고 서대문형무소에서 목숨을 다한 유관순 열사를 보았다. 그리하여 서대문에 가면 유관순 열사를 만날 수 있을 것이라는 제 나름의 결론을 도출한 것이다. 하지만 다섯 살 아이에게 서대문형무소는 다소 어렵고 무거운 곳일 것 같아 고민하던 나는 아이에게 답한다.
천안에 가면 돼. 이번 주말에 갈까?
그리하여 우리는 천안에 간다.
첫 번째 목적지는 유관순 열사 생가. 사실 이 생가는 독립운동의 상징으로서 복원된 건물로, 실제 유관순 열사가 살았던 집은 아니다. 하지만 아이의 몰입도와 현재감을 높이는 데 생가만 한 곳이 있을까 하여 이곳을 출발지로 삼았다. 아니나 다를까, 유관순 열사와 그 가족들이 모여 태극기를 제작하는 모습을 재현해 둔 방을 한참이나 들여다보는 아이. 그런 아이에게 새로 한 반찬을 아이 쪽으로 슬쩍 밀어줄 때처럼 다정하고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한 번 더 묻는다, “이 옆에 교회가 하나 있다? 같이 가 볼래?”
두 번째 목적지였던 매봉교회는 유관순 열사가 어린 시절부터 다닌 교회로, 교회 내에는 유관순 열사 전시실이 마련되어 있다. 제법 집중하여 전시물을 들여다보고 나니 생각보다 시간이 훌쩍 흘러 있었다. 천안에 와서 아무것도 먹지 못했으니 배를 든든히 채울 시간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세 번째 목적지인 병천 순대거리로 향한다.
“순댓국 세 그릇이랑 모둠순대 하나요!”
푸짐한 살코기에 뽀얗고 뜨뜻한 국물은 아이의 몸을 데운다. 나와 남편은 순대 위에 새우젓과 청양고추 한 조각을 조심스레 올리고는 입을 크게 벌려 한 입에 쑥 넣는다. 부드럽고 적당히 식은 음식을 아이와 나눠 먹는 게 일상이었거늘. 다대기 풀어넣은 순댓국에 편마늘 올린 모둠순대라니, 오늘의 육아는 채비 없이 슬렁슬렁 동네 산책하다 만난 네잎클로버다.
동그랗게 차오른 배를 맨투맨 속에 숨긴 채 우리가 향하는 다음 목적지는 유관순열사기념관이다. 병천 순대거리에서 기념관은 차로 5분 거리. 가을 햇살 아래 빛나는 아담한 동네를 보며 도란도란 대화하다 보면 금세 기념관에 도착한다. 푸르른 나무 사이로 보이는 유관순 열사의 동상을 지나 기념관 내부로 들어간다.
책에서만 보던 이화학당 룰루 프라이 교장선생님의 사진과 다양한 기록 자료들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아이. 어렸을 적부터 총명하고 당찼다는 유관순 열사에 대한 설명을 듣는 아이의 눈은 빛난다. 두려울 것 없는 표정으로 만세를 외치던 유관순 열사에게도 자기 같은 시절이 있었냐는 듯이. 아이는 서대문형무소의 여옥사 8호를 재현해 둔 공간에 특히 오래 머물렀다. 8호 감방의 노래가 몇 번이나 반복 재생되도록 자리를 뜨지 못한 너는 그곳에서 어떤 감정을 마주했을까.
기념관을 빠져나오자마자 아이는 다시 천진난만한 어린이로 돌아간다. 기념관 앞 널찍한 공터를 제 동생과 몇 번이고 뛰어다니다가 가파른 계단 위로 뛰어오른다. 유관순 열사의 영정이 있는 추모각으로 이어지는 계단이다. 추모각 주변으로 이어진 산책로와 그 길목에 있는 약수터는 어딘가 비밀스러운 느낌까지 든다.
한없이 걷고 싶은 산책로를 뒤로 한 채 또다시 떠날 채비를 한다. 대망의 독립기념관을 향해.
그런데 차에 탄 아이의 눈꺼풀이 무거워 보이는 건 가을 햇살이 강렬해서일까. 뜨뜻한 국물로 속을 데우고 생가와 기념관을 야무지게 누빈 아이는 차에 타자마자 카시트 안에 폭삭 안기더니 이내 느릿느릿 눈을 깜빡인다.
"인생은 항상 우리가 계획한 대로 되지 않아요.
그러나 그것이 바로 인생을 멋지게 만드는 부분이에요." - <빨간 머리 앤>에서
서둘러 시동을 걸었지만 최종 목적지에는 발도 디뎌보지 못한 채 잠들어버린 아이. 아이를 바라보며 나와 남편은 이내 피식 웃는다. 이제 시작인데, 이렇게 잠든다고?
이른 아침부터 서둘러 천안에 왔건만 독립기념관의 단풍길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우리는 오늘도 알아내지 못했다. 하지만 아이가 그토록 노래하던 ‘만세 만세 유관순’으로 가득 찬 하루를 보낸 건 분명하다. 어쩌면 우리는 이런 하루를 보내려고 이곳에 왔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까지 드는데.
아이가 잠든 탓에 고요해진 차 안에는 가을 날씨와 꽤나 잘 어울리는 노래가 흘러나온다.
“어차피 애도 자는데 카페 들러서 커피 좀 사갈까?”
“천안까지 왔는데 호두과자는 안 먹어? 호두과자도 사 가자.”
“오후 되니까 날이 더 예쁘네. 드라이브하는 맛 좀 나겠다.”
6년 전 나에게 단풍 구경을 가장한 교외 드라이브를 슬며시 제안하던 그 오빠가 내 옆자리에 있다.
이제야 같이 바라보는 천안의 가을날.
여행은 참 즐거워, 계획대로 되는 게 없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