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 방에서 나오지 않는 다섯 살 아이와 함께 살아요.
아이를 키워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 것이다. 아이가 걸음마를 시작하기 전, 아니 어쩌면 누워서 모빌을 바라보며 옹알이하는 그 순간부터도 아이들은 각자 타고난 기질과 성향에 따라 천차만별의 반응을 보인다는 것을.
내 아이가 꽤나 독립적인 편이라는 것을 아는 데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돌 무렵, 전면책장 앞에 주저앉은 아이가 제법 진지한 표정으로 보드북 책장을 휙휙 넘겨 대던 시절, 참을 수 없을 만큼 귀여운 아이의 뒤태를 보고 슬며시 다가가 끌어안아 볼 참이면 두 팔을 뻗어내 엄마 품을 벗어나기 바쁜 아가였다.
문 닫고 방에 들어가 낑낑거리며 내복을 벗은 뒤 스스로 고른 옷을 직접 입고는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방문을 열고 나오기 시작한 때가 아이 나이 세 살. 스스로 머리를 감을 수 있다며 엄마 아빠는 나가 있으라던 네 살을 지나, 아이는 어느새 다섯 살이 되었다.
다섯 살로 말할 것 같으면, 어린이집을 졸업하고 유치원에 가기 시작하는 나이. 등원하는 길에 만나는 동생들에게 “나는 다섯 살이라서 유치원에 가.”라며 아무도 묻지 않은 이야기를 자랑스레 늘어놓는 나이.
그런데 이 다섯 살이 방문을 닫고 들어가 혼자 놀기 시작하는 나이라는 건 어느 누구에게서도 들어본 적 없는 이야기였다.
시작은 소위 말하는 ‘선생님 놀이’였다. 유치원 선생님에 빙의해 그날의 수업을 재연하기 시작한 아이는 제 방 안에 있는 칠판 앞에서 시간을 보내기 시작했다. 어떤 날은 영어 선생님, 또 어떤 날은 담임선생님이 되어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수업하는 모습을 바라보며 나는 생각했더랬지, 식탁에 앉아서 ‘식지 않은’ 커피를 마실 수 있는 날이 생각보다 금방 오는구나.
방에서 후식을 먹겠다는 아이의 주문을 받고 과일 접시를 배달하는 날에는 내가 수험생 학부모라도 된 것 같아 피식거리기도 했더랬다. 그리고 마음 한구석에는 몰입의 즐거움을 깨달은 아이를 바라보는 흐뭇한 마음이 없지 않았다. 마음의 소리를 조금 더 높여볼까. “혼자 방문 걸어 잠그고 복습하는 아이가 있다는 이야기 들어보셨나요, 그 아이 우리 집에 있어요.”
그런데 아이가 방 안에서 보내는 시간이 점점 길어지기 시작했다. 빨랫감을 가지러 방에 들어오는 엄마에게 ‘방문이 닫혀 있을 때는 들어오지 말라’고 으름장을 놓는 이 아이가 정녕 다섯 살이 맞던가.
사실 방문을 닫고 나만의 세계에 빠져드는 그 맛을 모르는 바는 아니다. 나 또한 어린 시절 책상 앞에서 무수히 많은 꿈을 꾸고 수많은 상상을 했기에. 좋아하는 가수에게 팬레터를 보내겠다며 편지를 꼭꼭 눌러쓰던 열 살의 어느 하루, 노란 스탠드 불빛 아래에서 일기를 쓰며 라디오를 듣던 열다섯 살의 한여름 밤은 방문을 걸어 잠근 내 방 한구석에서 생성된 역사다.
딸깍 잠근 방문을 등지고 앉아 나의 취향과 생각에 집중하던 시간. 모든 것은 배경으로 밀려나고 오롯이 나에게만 집중할 수 있던 그 공간.
그 공간이 주는 ‘맛’을 내 모르는 건 아니지만, 어쩌면 너도 그 방문 너머에서 너의 밀도와 부피를 키워가고 있을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아직은, 거실에 널브러진 장난감 속에서 상상의 나래를 펼치고 소파 위를 우당탕탕 뛰어다니는 너를 보고 싶은데.
어쩌면 언제 그랬냐는 듯 방문을 열고 스윽 거실로 나와 온 집안을 누비는 널 보며 괜한 걱정 했다며, 좋은 시절 더 못 누려 아쉬워하는 날이 올 수도 있을까?
혹여나 엄마를 부르지 않을까 방문 너머 아이의 목소리에 귀를 쫑긋 세우며 뜨거운 커피를 마시는, 조금은 수상한 하루가 오늘도 흘러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