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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두옥 Sep 15. 2020

당신이 사랑이었습니다


가슴이 철컹했다. 


예정되어 있던 강의를 까맣게 잊고 하루를 다 보내고는 잠들기 전에 설마 하며 캘린더를 확인한 느낌이었다. 코드가 덜 꼽힌 채로 하루종일 충전기에 꽂혀 있던 스마트폰을 발견한 그런 느낌. 


왜 까맣게 잊고 있었을까. 

왜 그렇게 무심했을까. 

서운함에 잠든 당신 생각에 

마음을 걷잡을 수가 없다.


30일간 매일 질문을 받고 자정이 되기 전에 답하는 커뮤니티가 있다. 오늘의 질문은 '다음 생에 다시 태어난다면 연애하고 싶은 이상형은?'이었다. 아침 일찍 답변을 마치고 다른 사람들의 답을 읽는데, lois 라는 아이디의 멤버가 쓴 글이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마음이 아팠다. 


이런 사람을 찾고 싶어서? 아니다. 첫줄부터 마지막줄까지 덜 것도 없이 이런 남자와 살고 있음에도, 그것이 얼마나 소중한 지 모르는 내 자신이 너무 싫어서다. 내 두려움에 며칠 전  그에게 했던 아픈 말들이 가슴이 철컹할 만큼 미안해서다. 내가 쏟아낸 그 날카로운 말들이 나에게 다시 돌아와서 내 심장을 찌르는 것 같았다. 


습관처럼 하는 사랑한다는 말만 내뱉었을 뿐, 나의 신경은 온통 금주에 있는 행사 뿐이었다. 밥 먹을 때도 따뜻한 말 한마디 해 주지 못했고, 최근 떨어진 인터뷰에 대해서도 제대로 위로하지 못했다. 내가 침대에서 일어나면 말없이 침구를 정리해주고, 아침마다 물 한컵을 떠다주고, 커피를 만들어 2층까지 가져다 주는 그에게 고맙다는 말은 제대로 했는지 기억도 안 난다. 요즘엔 새로 입양한 강아지 때문에 더 신경이 딴 곳에 있었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도 못 챙면서 강아지라니. 


진심으로 미안하고, 진심으로 후회한다. 

그럼에도 늘 옆에 있어주는 그에게 감사하고.

오늘 신은 나에게 이걸 느끼게 해 주시려고
여지껏 깨워두셨나보다. 


패러데이 <퀘스천>에서 한 멤버가 쓴 이상형 글

나와 사는 것이 곧 연애인 남자. 

내가 아침마다 아침일기를 쓰는 책상을 내 소망대로 만들어주는 남자. 그 책상은 뚜껑을 여닫을 수 있는 클래식한 책상으로, 아침 일기 전용이다. 

저녁이면 와인 한 잔 앞에 놓고 같이 영화를 보고 그 영화에 대해 수다를 끝도 없이 떨 수 있는 영화 취향이 같은 남자.

물리적 공간 못지않게 숨쉴 영혼의 공간이 필요한 나를 위해 바람이 통하는 공간을 마련해주는 남자

기도하고, 글쓰고, 읽고, 걷고, 여행하는 나의 일상을 나보다 더 즐기며, 인생이 우리에게 무엇을 가져다줄지, 늘 설렘으로 기다리는 남자. 

내가 불치병이 걸렸을 때도 내 곁을 지켜주는 남자. 

내 최후의 병상을 지켜줄 남자, 

죽은 후에도 나와 나란히 묻히고 싶어하는 남자.

나이들어도 삶의 열정이 식지 않는 만년 청년인 남자.

삶의 떨림을 놓치지 않는 남자. 

무엇에서도 반짝이는 생명을 찾아내는 남자. 

내가 끓인 된장국을 땀을 흘리며 맛있게 먹어주는 남자. 

일하고 돌아와 피곤해 쓰러진 나의 손톱을 살며시 깎아주는 남자. 

냄새나는 강아지 똥을 웃으며 치우는 남자. 

togetherness의 의미를 제대로 아는 남자. 

모든 것이 이미 우리에게 주어졌음을 알고 감사하는 남자. 

진정으로 마음을 따라 살면, 진정 원하는 세상이 펼쳐진다는 것을 믿는 남자.

매일 하늘을 바라보며 오늘의 구름이 어제의 구름이 아닌 것을 즐기는 남자. 

나뭇가지 사이를 흔드는 바람의 소리가 어떤지를 아는 남자. 

하늘에 붉은 노을이 지면 밖에 나가서도 알려주는 남자. 

사랑이 밥 먹여준다는 것을 철썩같이 믿으며 우리의 종착역이 끝내는 사랑인 것을 아는 남자. 

모든 사람들에게 친절하지만, 우리만의 울타리를 세울 줄 아는 남자. 

평온한 죽음으로 자신의 삶이 괜찮았음을 말해줄 수 있는 남자. 

이 지상에서의 한 때를 너와 함께 한 것이 나의 가장 큰 행운이었다고 말해줄 수 있는 남자. 

눈물이 그칠 때까지 침묵으로 기다려주는 남자. 

더 좋아질 것만 있는 미래를 믿고 감사하는 남자. 

무엇보다도 아픔을 소명으로 익혀온 세월에 대한 감사를 잊지 않는 남자. 

삶이 남긴 마음의 생채기를 말없이 안고 쓸어주는 남자.  

늦잠을 즐기는 주말 아침, 블루베리 팬케익을 침대로 가져다주는 남자. 

가끔 핫배쓰를 같이 하고 등의 때를 밀어주는 남자. 

땅거미가 지는 저녁 공원 벤치에서 내게 무릎베개를 해주는 남자. 

피곤하게 일을 하고 온 내 발을 정성스레 마사지해주는 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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