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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두옥 Jul 03. 2017

차마 준비하지 못한 일이었습니다

아버지의 위암 선고를 들었습니다 - 2017년 5월 18일

진행성 위암
빠른 수술 권고


아버지의 말씀이라면 봉사활동이든 운전이든 뭐든 해 드릴 준비가 되어있었지만, 이건 차마 준비하지 못한 일이었습니다. 몇 개월 전부터 유난히 피곤하다던 아버지의 말씀을 허투로 들었던 제가 원망스러웠습니다.  


지난 주, 긴 하루의 마지막 미팅을 하러 가는 길. 건강검진을 마친 아버지께서 전화를 하셨습니다. 진행성 위암이 발견되어 수술권고를 받으셨다고. 위암 수술은 어렵지 않다고들 말하지만, 위암으로 돌아가신 분들도 꽤 알고 있기에 마음이 무거웠습니다.


뭘 어떻게 해야할 지 앞이 깜깜했던 저는 폰으로 '진행성 위암'이라는 키워드부터 검색했습니다. 제가 있던 곳은 처음 온 동네였는데 검색하느라 버스 안내를 듣지 못해 일곱 정류장이나 지나쳤습니다. 인생 선배님들이 많은 페이스북 iBrunch 그룹에 조언을 구하니, 친분이 있는 몇몇 분들이 댓글과 메세지를 주셨습니다. 두렵고 무서웠던 순간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당일 미팅에서는 우연하게도 서울대병원에서 항암제 개발을 하신 박사님을 만나서 암에 관한 실질적인 이야기들을 많이 들을 수 있었습니다. 암이 생기는 이유, 가공식품과 보조 영양제의 정체, 유전자조작 식품의 위험성 등. 이야기를 듣는 내내 눈물이 났습니다. 딸로서 이런 것들을 아버지께 챙겨드리지 못한 죄송스러움이 가슴을 때렸습니다.


주말에 저희는 처음으로 가족회의를 열였습니다. 

제가 처음으로 암 소식을 들은 터라 제가 아버지의 위암 상태와 수술방법, 그리고 가족 각자의 역할에 대해서 동생과 어머니께 설명을 드렸습니다. 앞으로 어머니는 유기농 식재료로 아버지의 식사를 준비하고, 동생은 병원과 보험 관련 서류를 챙기고, 저는 아버지의 병원 치료와 스케줄링을 담당하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그날부터 당장 가족의 식습관을 개선하기로 했습니다. 

집안에 있는 모든 비타민제와 보조 영양제를 버리고 음식 창고에 쌓여있는 통조림 제품과 라면도 처분했습니다. 맥심, 카누 등 인스턴트 커피와 가공된 티백을 휴지통에 넣고, 냉장고 속의 모든 가공 식품을 미련없이 버렸습니다. 일주일에 한번씩 배달되는 유기농 채소와 달걀, 콩나물, 두부를 주문했고, 가족 녹즙을 만들 믹서기도 구입했습니다. 어머니와 동생은 담배도 줄이기로 했습니다.


아버지와 저는 방도 바꿨습니다. 

아버지께서 맘편히 기도하고 푹 주무실 수 있도록 저희 집에서 가장 조용하고 해가 잘 드는 제 방을 아버지에게 드리고, 저는 아버지가 쓰시던 공간으로 나왔습니다. 동생은 아버지가 좋아하는 성가를 어디서나 들을 수 있게 블루투스 이어폰을 선물해 드렸고, 제가 쓰던 태블릿도 아버지께 드렸습니다. 좋아하는 것을 맘껏 하시며 조금이라도 스트레스를 덜 받으셨으면 하는 마음에서였습니다.


올 겨울에는 아버지와 유럽 여행도 다녀오기로 했습니다. 유럽과 남미 성지순례는 참 오랫동안 아버지의 버킷리스트에 있었는데 이제는 더 미루면 안될 것 같거든요. 딸은 두세 달이 멀다 하고 비행기를 타는 동안, 정작 당신은 인천공항 게이트 한번 넘어보지 못하셨는데... 올해는 함께 프랑스, 이탈리아, 바티칸, 스페인 등을 돌면서 아버지께서 늘 가고 싶어하시던 성당과 성지들을 둘러보고 맘껏 기도하실 수 있도록 도와드리려고 합니다.


아버지는 오는 목요일 서울대학교암병원 양한광 교수님께 진료를 받으실 예정입니다. 위암은 비교적 쉬운 수술이라고 하지만 생명이 달린 일인데, 제 힘이 닿는 한 좋은 병원, 좋은 선생님께 수술받길 바라는 마음입니다. 암이 진행중이라니 단 한시간이도 빨리 수술을 받길 바라지만, 이 역시 제 마음대로 할 수 없는 것이니 기도하는 마음으로 기다려야겠죠.


삶이, 생명이, 그리고 죽음이 이렇게 절실하고 가깝게 다가온 적은 처음입니다. 무엇을 위해서 살고 있는지, 내 삶에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이렇게 또렷하게 느낀 적은 처음입니다. 내 옆의 한 사람 한 사람이 이렇게 고마운 적도 처음이고, 무관심했던 타인의 고통이 내 일처럼 느껴지는 것도, 부끄럽지만, 처음입니다.


어쩌면 이것은 제 삶의 숙제, 
신이 주신 축복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위암 소식에 메세지로 좋은 정보들을 알려주신 iBrunch Supporters 모든 분들에게 감사합니다. 처음 소식을 듣고 놀랐을 때 이런저런 정보를 주신 변주경 & 김주한 커플에게 너무 고맙고, 내 일인 양 걱정해 준 한창훈 코치님과 Su Kim 박사님도 정말 고맙습니다. 암에 관한 인식을 넓혀주신 박천문 박사님께도 감사하고, 아버지 병원 일정에 맞춰서 미팅 일정 조정해 준 대웅제약 스마트오피스 TFT 멤버들에게도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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