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중의 합리적인 지출에 관하여
일 년에 한 번 여행을 할까 말까하는 이들에게 해외여행은 '설레임' 일 것이다. 매 년 세 번 이상 해외를 나가는 내게도 여전히 여행은 설레임이다. 다만 ‘소비’와 ‘기다림’이라는, 여행의 환상과는 거리가 있는 두 수식어가 추가될 뿐. 오늘은 그 중에서도 ‘소비’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볼까 한다.
좀 과장해서 표현하면, 여행은 소비로 시작해서 소비로 끝난다. 집을 떠난 후부터 움직이는 순간마다 비용이 든다. 비행기와 숙소는 물론이고, 집에서 공항까지 가는 데도 차비가 들고, 해외 공항에 도착해서 호텔까지 택시를 타는 데도 꽤 비용이 든다. 유명한 여행사의 하루짜리 투어를 신청했다면 말할 것도 없고, 대중교통으로 배낭여행객처럼 시내를 돌아본다고 해도 이동할 때마다 2-3천원에 가까운 대중교통 비용을 빠짐없이 지출해야 한다. 하루에 두 번 이상 해야하는 식사도 소비고, 길가다 가벼운 마음으로 사는 기념품 하나도 결국 소비다. 내가 주로 방문하는 유럽은 특히 그렇다.
돈은 없고 시간은 많던 학생 시절에야 어떻게 하면 1달러라도 아낄까 고민하면서 여행 계획을 짰지만, 돈 보다는 시간이 귀한 지금은 최적의 가성비를 찾는다. 1-2달러 아끼려고 불편함을 감수하거나 시간을 더 쓰는 일은 거의 없다. 그렇게 아낀 금액이라는 게 티도 나지 않을 뿐더러, 즐겁자고 시작한 여행을 피곤하게 만드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합리적인 지출을 하려면 수 십만원에서 수백만 원대를 지출하게 되는 항공권과 숙소 예약시에 신경을 좀 더 쓰는 게 훨씬 가성비가 좋다. 돈은 버는 것도 그렇지만 아끼는 것도 큼직한 곳에서 아껴야 의미가 있다.
2주 이상으로 일정을 짜는 나의 경우 가장 많은 비용이 들어가는 것은 숙소다. 내가 자주 가는 서유럽이나 북유럽을 여행하는 경우에는 적어도 개인당 1박에 10-15만원 정도가 들어간다. 여행의 시기가 비교적 자유롭기 때문인지 오히려 항공권은 직항도 왕복 80만원을 넘어가는 경우가 드물다. 하지만 숙소는 시즌의 영향을 많이 받지 않는데다, 여행이 길어질수록 비례해서 증가하는 비용이라서 출발 전에도 꼼꼼하게 가성비를 따져서 합리적인 지출을 하려고 노력한다.
그런데 이 ‘합리적인 지출’이라는 게, 어떤 선을 넘으면 오히려 비합리적인 의사결정을 하게 되는 경우가 종종 있다. 가격 비교 자체가 숫자로 이루어진 게임이다 보니, 그 숫자 자체에 집착해서 의미없는 수준의 금액을 아끼려고 의미있는 수준의 퀄러티를 포기하는 어리석은 상황을 만들기도 한다는 뜻이다. 구체적으로 예를 들어보면 이렇다.
내가 프랑스 파리에 방문할 때 주로 머무는 지역 중에 라데팡스(La Defense)라는 도시가 있다. Airbnb 나 Hotels.com 을 통해서 이 지역의 숙소를 검색하면 6만원대부터 20만원대까지 다양한 숙소가 나온다. 나는 가성비의 차원에서 약 8-10만원 대의 개인실(private room)을 선호하는데, 사이트를 통해 방을 비교하다 보면 다양한 옵션이 나온다. 85,234원, 88,293원, 91,002원, 95,210원, 110,200원 등... 환율 때문에 숫자가 좀 지저분하긴 하지만 다양한 금액이 검색 결과로 나온다.
예전에 나는 가장 저렴한 방을 먼저 살펴보고, 그 방이 맘에 드는지 여부를 확인하면서 다음 가격대로 올라가곤 했다. 그러다 보면 9만원짜리 방이 더 맘에 드는데도 불구하고 8만원대의 방을 고를 때가 많았다. 특별히 나쁠 게 없는데 가격이 저렴하니까. 내가 필요한 것 중에서 가장 저가를 선택하는 게 합리적인 선택이라고 생각했다. 산술적인 금액 차원에 생각이 머물렀던 거다.
하지만 이제는 다르다. 내가 지불할 의사가 있는 금액의 최고선을 설정하고, 그 안의 옵션 중에 가장 머물고 싶은 방을 고른다. 가장 좋은 방을 골라도 가장 저렴한 것과 금액 차이는 하루 1-2만원 수준. 달랑 10만원 아끼려고 일주일 내내 ‘그저그런’ 방에 머무는 건 궁극적으로 여행을 시작한 목적과 맞지 않다는 생각이 들어서다. 정말 그 10만원을 아껴야 한다면 차라리 하루 일찍 귀국하는 편이 낫다.
한번에 지불하는 금액이 숙소보다 더 적은 경우라면 두 말한 나위도 없다. 몇백원 아끼려고 돌아가는 버스를 탄다거나, 몇 천원 아끼려고 역사적인 관광지의 입장을 패스한다면 한국에 돌아가서 후회할 날이 분명히 있을 거다. 고백컨데, 옛날에 대학생 신분으로 스타벅스의 탄생지인 씨애틀을 방문했을 때, 커피값 3.6 달러가 아까워서 스타벅스 1호점에 들러서도 커피 맛 한번 안 보고 귀국한 적이 있었다. 그 땐 커피를 안 먹어도 1호점에 왔으니 괜찮다고 생각했는데, 한국에 와서 엄청 후회했다. 100만원짜리 항공권 끊어서 미국을 갔는데 3.6달러 아끼려고 그 커피를 안 먹다니. 정말 바보 같은 의사결정이었다.
스타벅스 실수와 같은 연장선상에서, 대개의 역사적인 관광지 입장권은 한국에서 커피 1-2잔 혹은 택시비 한번이면 쉽게 날아가는 돈이다. 쓰나 안 쓰나 크게 보면 내 인생 흔적조차 없을 금액이라는 뜻이다. 만 원이 조금 넘는 입장료가 아까워서 개선문의 내부를 패스한다면 - 물론 관심이 없어서 둘러보지 않는 경우는 해당사항이 아니다 - 100만원 이상의 항공비를 써가며 파리에 오기 보다는, 구글 스트리트뷰를 이용해서 파리를 구경하는 편이 훨씬 나을지도 모른다. 고가의 항공비에 여행을 오지 않았으면 할 수 있었던 일들의 기회비용까지 합친다면, 만원은 정말이지 세발의 피도 안되는 돈인데, 그걸 볼까 말까 망설이다가 패스했다면 비합리적인 소비의 전형이 아닐지.
거듭 강조하지만, 방문하는 모든 관광지의 입장권을 끊어야 하고, 언제나 좋은 숙소를 골라야한다는 뜻은 절대 아니다. 내가 가고 싶은 곳이고, 내가 머물고 싶은 곳인데 의미없는 숫자의 돈을 아끼려고 그 욕망을 포기한다는 것은 오히려 손해일 수 있으니, 여행 중의 소비는 조금 더 큰 관점에서 결정해야 한다는 말을 하고 싶을 뿐이다. 덧붙여, 과거 나의 비합리적인 여행 소비 패턴을 고백함으로써 혹시라도 과거의 나처럼 여행하고 있는 이들에게 새롭게 소비를 바라볼 포인트를 제공하고 싶을 뿐이다.
소비를 하고 싶지 않다면 애초에 여행을 시작하지 않았어야 한다. 즐기기로 마음을 먹었으면 소비도 즐기자! 자신의 삶에 즐거움을 선사하기 위해 시작한 여행이라면 더 더욱.
최두옥 (스마트워크 디렉터)스마트워크 R&D그룹 '베타랩' 대표
'토즈'에서 공간기획팀 팀장으로 '스터디센터'와 '스마트워크 라운지'를 만들었고, 2010년부터는 유럽의 스마트워크 컨설턴트들과 협업해, 국내 기업의 일터혁신을 디렉팅하고, 스마트워크를 정착시키기 위한 컨설팅/교육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코워킹스페이스를 기업의 미래 오피스로 바라보며, 현대인들에게 최적화된 코워킹스페이스와 코리빙 공간을 연구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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