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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ooookong Mar 31. 2018

그게 익숙해져서

자기세뇌와 온전한 비움

평일 저녁, 늦은 저녁식사에 동참하게 된 나는 사실 밥을 먹어야겠다는 생각이 크지 않았다. 복잡한 길을 헤매다 나를 찾아온 친구는 하루 종일 육체적 정신적으로 시달리느라 입에서 단내가 난다 했고, 내가 보기에도 친구는 당장 뭐라도 씹어 삼키지 않으면 내 앞에서 퍼져버릴 것만 같았다. 나는 할 일이 남아있었지만 친구를 핑계로 잠시 하던 일에서 해방을 맞기로 했고, 그렇게 늦은 저녁 식사로 곰탕을 먹게 됐다. 누구나 각자의 식습관이 몸에 배어있고, 입맛도 그 습관에 맞게 다양하다. 누구네 가족과 우리 가족의 생김새가 다르고, 성격이 다르고, 취향이 다른 것처럼 세상에는 그런 무수한 가족들이 있을 테니 다양한 정도는 천차만별, 수천만수만별은 되겠지? 

아무튼 간(소금, 간장)을 잘 해 먹지 않는 나는 이미 간이 되어 나온 곰탕이 너무 짰다. 언제나 그렇듯 직원에게 뜨거운 물을 한 컵 받아 희석시켰고, 강한 첫맛이 각인되었는지 여전히 짜게 느껴졌다. 식성에 대해 고백부터 했던 건 이런 내가 까다로워서가 아니라 달라서임을 강조하고픈 방어라도 해도 할 말은 없다. 하여튼 평소 입이 짧은 친구가 그날따라 너무 맛있게 먹었던 건 그냥 배가 고파서일 수도 있다고 나의 방어를 보충해본다. 


이렇게 익숙해져 버린 게 또 있을까. 자주 입게 되는 옷, 어떤 내숭도 필요 없는 사람, 걷다 보면 닿게 되는 곳, 심지어 취침이나 걷는 속도마저도 제각각 나름의 습관이 배어있을 것이다. 뜯어고쳐야 겨우 고쳐지는 몸에 벤 습관은 그동안의 익숙함이 낯설어질 때쯤 변화를 인지하게 되곤 했다. 최근에 내가 바꾼 습관 중에 하나는 잠자리에 누워 종아리 밑에 깔아 둔 야구공으로 이리저리 번갈아 다리를 움직이는 것이다. 일도 취미도 대부분 앉아서 하는 것들이 많아서 그런지 다리를 위로 올리고 자도 다리가 자주 붓거나 뭉치는 일이 많다. 어차피 수년째 불면증으로 낮과 밤이 애매하게 뒤바뀐 수면습관이 있던 터라 핑계 삼아 자리에 누워 문질 거리면 어느새 잠이 들기도 하니 일석이조 비슷할 수도 있겠다. 처음엔 그동안 뭉친 근육과 피로에 느닷없는 압박이 가해지니 저들도 놀랐는지 통증이 기분 나쁘게 불편했다. 일주일쯤 지나 이제는 자리에 누울 때 베개 위치를 잡듯 익숙하게 야구공을 종아리 아래 깔아놓는다. 이런 습관이 생긴 후로부터 왠지 다음날 다리가 가벼워진 느낌이 들고, 걷기 좋아하는 내 걸음에 더 탄력이 붙는 것 같았다. 기분 탓인가? 아무튼 '익숙하다, 익숙해지다'라는 건 습관을 떠나 어떤 면에서는 '또 다른 변화로의 입문'인지도 모르겠다. 


자기세뇌라는 말이 있다. 검색 정의로는 '세뇌(brainwashing)'란, 누군가의 사상이나 가치관을 다른 방향으로 바꾸거나 설득하는 노력이라고 하는데 쉽게 말해 스스로 이게 맞고, 이래야만 하고, 모든 면에서 이게 옳다고 강조하는 태도를 뜻한다. 부정적으로는 각종 콤플렉스적 증후들-착한사람 콤플렉스, 마초 콤플렉스 등이나 종교에 잘못 빠진 광신교들이 어떤 식으로든 세뇌에 당착 된 케이스이고, 긍정적으로는 말기 암 환자들의 재활의지(일종의 플라시보 효과도 그렇지 않을까?)나 스포츠 선수들의 기록 경신을 위한 투지 등이 세뇌를 통한 노력일 것이다. 또 다른 세뇌는 뭐가 있을까. 자존감이 극도로 나약해진 사람이 있다고 가정하자. 나 일 수도 있겠고 이 글을 읽고 있는 누군가일 수도 있겠다.


자존감은 자존심과는 다르게 해석한다. 이를테면 외적으로 어떤 대상에 대해 입장이 낮아지거나 무시당하고 싶지 않은 상태는 자존심을 높인 상태, 거꾸로 말하면 '자격지심'과도 맞먹는 상태다. 자존감은 내적으로 스스로 입장이 낮아지거나 무시당한다고 생각하는 상태로 '자기비하'와도 맞먹을 수 있을 것 같다. 자존감이 낮아진 즉, 자기비하가 높아진 사람은 자기세뇌를 건강하게 하기는 힘들 것 같다고 생각한다. 내 경우를 빗대면 일이 끊기거나 그래서 통장이 심심해졌거나 외모가 마음에 들지 않거나 지식적으로 부족하다 느낄 때, 잘 하던 일들의 결과가 좋지 않고 다른 사람들과 비교해 낮은 평가를 받았다거나 누군가와 이별을 하고, 배신을 당하는 등 많은 이유들로 인해 자존감이 떨어졌을 때는 심리적으로 나쁜 생각을 비우고 좋은 생각들로 채우는 동안 세뇌의 방향을 잃곤 했다. 긍정적인 생각을 하거나 비움으로써 채워보는 것도 경험했고, 가벼워지기 위한 노력들을 쉴 새 없이 해봤다. 그러나 그동안에도 의식하지 못하는 부정들이 나를 쑤셔대는 통에 노력이 맥을 놓는 게 부지기수였다. 한동안 공부도 할 겸 철학, 심리, 명상과 관련된 책들을 읽으며 어질러진 속내를 분리수거해 본 적이 있었다. 그때의 양식들은 살면서 가벼움의 가치와 자유로움의 힘을 알려줬고, 살면서 상황이 반복될 때면 그때 길러진 힘으로 전보다 빨리 회복할 수 있었다. 그런데 그 역시 세뇌였다는 걸 최근에 의심해보게 된 것이다. 다른 의미의 자기세뇌에 빠져든 것! 충격적이었다.


괜찮아야 하므로 괜찮아지려고 했던 것들, 가벼워야 하므로 가벼워지려고 했던 것들, 건강해져야 하므로 건강해지려고 했던 모든 것들이 '참 잘한 일'이 아니라 '참 열심히 한 세뇌 수고'였던 것이다. 온전히 괜찮지 않았고, 온전히 가벼워지지 않았으며 온전히 건강한 상태도 아니었다. 의식적으로 익숙해진 변화였던 것이다. 좀 나아진 것 같았고, 좀 편해진 것 같았지만 그 낯선 변화의 일부는 일부러 강조하고 다짐해야만 했던 의지와 의식들의 결과였다. 겉으로 보면 훌륭한 변화였지만 속으로는 '변화가 필요했던 것' 뿐인지도 모른다. 이런 생각의 흐름이라면 누군가는 자기세뇌, 자가 치유, 자기극복 이 모든 것들이 의미 없는 노력이 아니란 말이냐고 반문할 수도 있겠다. 물론 그 노력들이 흔들리며 살아가는 내게 든든한 동아줄이 되어주고, 반성할 수 있는 벤치가 되어주고, 딛고 일어설 수 있는 버팀목이 되었다는 건 사실이다. 다만 나를 비롯해 우리 중의 누군가가 또다시 자기 번민에 놓이게 될 때, '아! 나는 그저 세뇌당하고 있었던 거였군' 하고 생각이 든다면 이제 그 세뇌조차 약발이 없게 되겠다는 것에 놀란 것 같다. 지금까지 잘 해왔다. 세뇌도 극복도 모두. 그런데 요즘 그냥 애초에 본능의 흐름으로 나를 맡겨볼 걸 하는 후회를 해봤다. 거꾸로.. 짠 곰탕에 뜨거운 물 한 컵을 희석시켜 먹기 전으로. 오늘은 늦은 저녁을 먹고 싶지 않다고 말해야 할 타이밍으로. 내 의식이 가장 편한 상태로 있어야 했다는 생각 말이다. 그때 피하지도 말고, 도망치거나 조급해하지 말고 그냥 하고 싶은 대로 할 걸. 이런 마음 저런 마음 다 내려놓고, 이런 사람 저런 사람 배려하지 않고, 이렇게 저렇게 양보하지 말고 그냥 온전히 내 의식대로 있을 걸 그랬다. 온전치 못해서 지쳐버린 걸 수도 있다는 걸 몰랐다. 그래서 우리는 종종 고독해지며, 끊임없이 쉼이 있는 동굴을 찾는 것인지도 모른다. 의지대로 세뇌되어 만들어진 마음의 고요에 익숙해져 버려서 어쩌면 진짜 편안한 건지 아닌지조차 알아채지 못한 채로 말이다. 다들 그렇다니까, 그런 게 인생이라니까 그런 줄만 알고. 나도 그래야만 된다고. 


- maybe dooookong's dai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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