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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ooookong Apr 03. 2018

고독한 탄수화물

가만히 둘 수 없어서 그만

나는 성장기 이후 지금까지 한결같이 언급하는 단어가 하나 있다.

사랑? 아니다.

행복? 아닌 거 같다.

친구? 비슷할 수도 있겠다.

사랑과 행복 그리고 친구 이 모든 따뜻한 단어들이 이 단어 하나의 긴장을 못 이긴다. '다이어트'

겨울의 두터운 옷을 거두고 살랑살랑 봄바람이 불기 시작하더니 이제껏 한평생을 내 이름처럼 달고 다닌 다이어트가 또다시 고개를 들었다. 오늘 아침에 방에 붙은 종이에는 '3월부터 탄수화물 금지'라고 매우 공격적으로 쓰여있었고, 지금은 4월이 시작됐다. 물론 그 공격은 언제나 전쟁에서 패했고, 4월인 어제도 오늘도 여전히 휴전일 뿐, 언제 쳐들어올지 모를 긴장으로 짜증이 올라온다. 죽기 전에 전쟁이 끝날 지 모르는 슬픈 이야기이기도 하다.


수시로 SNS에 올라오는 몸짱녀들의 사진을 보고 있자면 언제부터 우리나라에 연예인보다 연예인 같은 사람들이 많이 있었나 눈을 의심해본다. 마치 음식 사진을 보며 기분이 좋아지고, 개와 고양이 사진을 보며 울듯이 즐거운 것처럼 그녀들의 사진을 보고 있으면 상대적 박탈감을 느낄 새도 없이 푸욱 빠져든다. 대리만족이랄까? 말도 안 되는 얘기다. 이와 비슷한 사진을 자주 접하다 보면 기준이 높아지고, 의욕도 붙겠지 싶어서 일부러 팔로우까지 하고 들여다보는데, 기대했던 의지나 행동은 오른손 엄지손가락으로 밀고 누르며 근력을 다지곤 한다.

그래서 작정을 하고 탄수화물을 줄이자고 선언했다. 최근에 친한 언니가 두 달간 탄수화물을 끊었더니 턱선이 살아나고 소화가 잘되며 삶에 의욕이 생기더라며 소식을 전하기에 나는 '그래, 생각해보면 탄수화물 안 먹고도 먹을 게 너무 많네. 내가 좋아하는 당근, 고기, 견과류, 과일, 달걀..' 갖가지 식품들을 떠올리며 식단까지 정리해봤다. 하루가 이렇게 빠른데, 일주일 한 달은 껌이겠다 싶었다.


다음 단락의 첫 문장은 '하하하'로 시작하고 싶다. 이유는 짐작했겠지만 만 하루도 안 되어 탄수화물을 섭취했고, 나는 의지박약자로 자가진단 내렸다. 한 때, 지독하게 운동하고 조절해서 꿈의 몸무게를 유지했던 의지의 나는 나이와 함께 지나간 세월에 묻혔나 보다. 한창 사춘기 때였는데, 천재소년 두기를 닮은 그 오빠 때문에 독하게 맘먹고 한 두 달 사이 5KG 감량을 했던 다이어트 천재는 다 옛말인 것이다. 지금은 두기 오빠도 없고, 몸은 원상복구가 되었고, 성장기에 과격한 식단관리로 키도 멈췄다는 불편하고 불우한 사실은 개탄해 마지않겠다.

여하튼 최근에 시작한 일은 최소한의 원고료로 최대치의 일을 해야 하는 노. 가. 다에 전공분야도 아니라서 매일 다른 일을 제쳐두고 하루 종일 이 일에만 매달려 있는 신세다. 나처럼 동분서주 떠돌기 좋아하고, 비주얼적 감각을 쫓아다니는 사람에게 '국가안보'와 '통일전망'은 다이어트처럼 어렵고 독하다. 딱 이 시점에 탄수화물을 끊겠다 선언했더니 왜 더 당기는 건데.. 꾸역꾸역 넘쳐나는 정보와 자료는 오버 잇 하기 딱 좋게 거북하고, 난생처음 접하는 기관과 단체들은 무슨 무슨 무슨 무슨 조합, 어떤 어떤 어떤 어떤 협회 등 이름을 읽어내는 것도 일이다. 즐기자, 재밌다, 와 신난다 세뇌를 걸어도 책상에 앉아 있는 내 발은 굴삭기처럼 당당당 바닥을 두드린다. 처음엔 바닥을 두드리는 당당당이 정말 당(sweet)인 줄 모르고, 이 스트레스를 어떻게 해소하지 싶었다. 기지개도 켜고 SNS도 하면서 시간도 때워보고, 톡을 날려대며 기분 전환할 방법을 물색했다. 마침 섭외 차 걸어놨던 사람에게 연락이 왔고, 밖으로 나가서 통화를 하다가 우유를 사러 들어간 편의점에서 그를 보았다. 초콜릿..

수많은 초콜릿들 중에서 맨 앞 줄에 노란색 옷을 입고 M&M이란 명찰을 달고 서있는 그 친구가 너무 고독해 보였고, 당장이라도 함께 시간을 나누면서 서로 위로를 해야 할 것 같았다. 역시 내 생각은 옳았고, 그렇게 만 하루도 안되어 탄수화물과 하나가 되었다. 하.. 매번 초콜릿을 먹을 때마다 생각하는 거지만 왜 사랑을 고백할 때 초콜릿을 주고 왜 초콜릿 광고에 최고의 스타가 등장하고, 왜 험한 산을 오르며 주고받는 초콜릿 한 알이 우정이 되는지 너무 알 것 같다.   


결국 오늘도 탄수화물 금지는 무장해제되었고, 내 마음은 고독해졌다. 자책은 하지 않으려고 한다. 오늘도 해가 지면 운동화 끈 동여매고 산자락 너머로 걸어야 될 것 같다. 사실은 지금도 집중이 안 되어서 끄적거리고 있다는 .... 고독하고 고독하다.


- maybe dooookong's dia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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