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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ooookong Apr 11. 2018

몬태나

사라지는 것과 사라져야 하는 것들


오랜만에 혼자 보는 극장영화였다. 생맥주 한 잔에 나초칩 옆구리에 딱 끼고 앉아 본 영화는 몬태나. 시작하자마자 나는 어린 시절의 기억 한 장면이 스크린 위로 겹쳐졌다. 지금보다 적어도 열배는 뚱뚱한 체격의 텔레비전이 있었고, 덩치에 비해 작았던 화면에서는 챙이 큰 모자 아래로 턱수염이 덥수룩한 황야의 사나이가 큰 장총을 내 쪽으로 겨누고 있던 찰나였다. 펑.. 사나이는 뭐 별거냐는 듯 썩소를 날렸고, 돌아서는 그의 등 뒤로 휘파람 음악이 흘렀다. 지금 생각해보면 서부영화의 매력은 바로 ‘사나이다움’이 아니었나싶다. 사나이답다는 건 신체 건강하고, 태도 듬직하고, 불의를 못 참는 강한 이미지만은 아니다. 마음이 따뜻해 눈물을 흘릴 줄 알고, 자신을 희생해 사람을 구할 줄 알고, 잘못을 용서해 죄인에 자비를 베풀 줄 아는 것들도 포함되는 것이다. 영화에서 이렇게 단단하고도 여린 ‘사나이’는 바로 조셉 J 블로커 대위였다. 크리스찬 베일, 이 엄청난 배우가 마침 그 사나이였다는 것에 마음속으로 기립박수를 보냈다.



영화는 초지일관 고요했지만 딱 그만큼 긴장감이 넘쳤다. 초반부터 끝까지 펼쳐진 드넓은 초원과 황량한 대지는 그 경관만으로 충분히 감동이었지만 딱 그만큼 쓸쓸하고 잔인했다. 영화 ‘몬태나’는 이렇게 정반대되는 것들이 공평하게 보여 졌던 영화였다. 인종과 종교를 바탕으로 행해진 대량학살은 그 배경사실 자체로 분노와 비호감을 유발하지만 이 영화에서는 오랜 과거에 대한 용서와 이해, 그리고 자비를 구하는 늬앙스가 곳곳에서 느껴졌다. 과거 포로였던 조셉 대위의 지난 날, 그리고 그곁을 함께 했던 전우들의 대화 속에서 결국은 가해자도 피해자도 모두 똑같은 사람이며, 모든 행위들은 스스로 원했던 일이 아니었다며 묵음을 전한다. 누군가는 울고, 누군가는 원망하고, 누군가는 괴로워하며 스스로 목숨을 끊으면서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기서 ‘그럼에도’는 남편과 아이들을 눈앞에서 처참하게 잃게 된 로잘리아의 불행을 뜻한다. 미쳐버린 세상에 더 이상의 의미를 찾을 수 없는 로잘리아는 어느 날 조셉 대위를 만나 몬태나로 가는 긴 여정에 편승하게 된다. 잃어버린 삶을 되찾기 위해 무언가를 향한 복수의 칼도 갈지 않는다. 대신 누군가에 도움을 청하고, 비슷한 처지들의 상처를 위로해주는 과정 속에서 세상을 향해 보란 듯이 새롭게 인생을 전환시킨다. 초반부에 로잘리아가 조셉 대위를 만나 죽은 남편과 아이들을 땅에 묻는 장면이 나오는데, 사랑하는 가족을 제 손으로 묻겠다는 그녀의 슬픔은 여린 손끝으로 파낸 마른 흙처럼 부스러지고 흩어지며 절박했다. 나는 그 장면에서 왈칵 눈물이 쏟아졌다. 죽음보다 더 슬픈 게 삶이란 걸 생각했던 것 같다.


영화 ‘몬태나’의 개봉을 앞두고 좋은 기회를 만나 먼저 볼 수 있었는데, 두 시간이 넘는 이 영화는 재미와 감동을 찾기보다 여운과 성찰의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역사, 가족 그리고 자아의 의미가 영화의 흐름 속에 들어있다. 길게 느껴질 것이다. 어쩌면 끝까지 앉아있기 힘이 들 수도 있겠다. 느리고, 담담하게 다가올 수도 있다. 그러나 자리를 벗어나지는 못할 것이다. 이유는 이미 영화가 시작되면서 생각에 잠겼을 것이고, 그 집중은 마지막에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정리될 것이기에. 봄이다. 누군가 들뜨고 가벼워지는 계절에 의미 없는 날림의 하루를 보내고 있다면, 어느 때, 어떤 이들의 시절 속에서 삶의 의미를 한 번 느껴보길 권하고 싶다.  



P.S 영화 ‘몬태나’에 나오는 크리스찬 베일은 이번 영화에서도 미친 존재감을 드러낸다. 어린 시절 텔레비전에서 봤던 서부 사나이의 후광이 조셉 대위에 옮겨왔고, 사실은 배역마다 스펀지처럼 캐릭터를 흡수하는 크리스찬 베일의 빛이 조셉을 비췄는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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