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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동동 Jul 08. 2023

로또광에게 간택당하다

좋은 일은 좋은 일을 불러온다!

차도엔 페라리, 람보르기니, 포르쉐같은 고급 스포츠카들이 웅웅 천둥소리를 내고, 인도엔 쭉쭉 뻗은 큰 키의 사람들이 저마다 고급스러운 취향을 뽐내며 거리를 런웨이처럼 돌아다니고 있는 이곳은 청담 CGV 앞. 그 앞에 짜리 몽땅한 내가 서있다. 목걸이 펜을 차고 대본과 큐시트가 꽂힌 클립보드를 든 채로. 청담 CGV, 오늘의 촬영장소에서 나는 치열하게 일하고 중이다. 촬영지에 도착한 출연자들을 무사히 스튜디오까지 딜리버리 하고, 그들의 차를 주차장으로 인도해 입차와 출차까지 스무스하게 진행시키는 게 나의 주임무. 돈을 따블, 따따블로 줘도 주차공간을 안 내어주는 주차지옥 청담에서 임무를 완벽히 수행하게 위해 CGV 주변 가깝고 규모가 있는 웨딩홀 주차장을 찾았다. 거기서 만난 주차 소장님에 대해 얘기해보고자 한다.


첫 만남에 나는 온통 일 생각뿐이어서, 그 아저씨에게 주차비용을 미리 결제하면 안 되는지, 주차공간 확보가 가능할지 등 질문을 와다다 쏟아냈다. 주차비 선결제가 안 되면 누군가 주차부스 앞에서 출차할 때마다 일일이 결제를 맡아서 해줘야 한다(아마도 그건 나…). 연예인이 올 땐 보통 차량 1~4대(매니저, 스타일리스트, 헤메 담당스텝 등등) 쯤 오는데, 출연자가 5명만 돼도, 평균 10대의 차량을 내가 담당해야 한다. 애석하게도 이곳은 종일주차권 같은 개념이 없었다. 하지만 애타는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돌아오는 대답은 모두 No. 한 마디로 차를 뺄 때마다 나는 주차 정산부스 앞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출연자 차량이 나갈 때마다 계산을 해주어야 한다는 뜻. 뿐만 아니라 매니저가 잠깐 주차장을 나와 이동할 때도 쫓아 나와 회사 법카로 주차비를 결제해줘야 한다. 당연히 나는 주차부스 앞에서 서성이는 시간이 늘어났고, 자연스럽게 주차부스를 지키는 아저씨와 대화 또한 많아졌다. 그렇게 아저씨와의 인연이 시작됐다.


아저씨와 나의 만담장소


아저씨는 T**라는 로고 찍힌 까만 모자를 쓰고 있었고, 푸른색 계열의 셔츠, 까만 기지바지를 입고 있었는데, 아파트 경비 아저씨와 인상이 비슷했다. 청담에서 만난 사람들이라곤 죄다 명품 하나씩은 들고 있는 깍쟁이들이었는데, 아저씨의 수더분한 모습에 나는 금세 무장해제 됐다. 아저씨는 무공해한 말투로 주차자리는 왜 이렇게 찾냐, 이 동네에선 그렇게 주차 자리를 예약하지 못한다. 이런 상식을 알려주시고선 대뜸 번호 세 개만 불러보라고 말씀하셨다. 단, 숫자의 범위는 1~45.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 로또나 사보게~”

7개 번호를 찍는 게임에서 절반에 가까운 3개나 내 운에 걸다니!

나는 대답했다.

 “아, 저 지난주에 4등 당첨됐는데…”(사실이다. 난 매주 로또를 산다.)

아저씨의 눈이 갑자기 초롱초롱해지더니 그럼 번호 네 개를 불러보란다. 그런 아저씨의 반응이 재밌어 놀리고 싶어 진다.

“에이 4개는 안 돼요. 3개만 말씀드릴게요. 4, 19, 음… 44 이렇게 세 개 알려드릴게요.”

아저씨는 하나만 더 알려달라며 치근덕거렸지만, 나는 뿌리쳤다. 그새 나도 청담깍쟁이가 된 건가?! 호호



주차대란 속 그날의 촬영은 무사히 마쳤고, 2주 후, 다시 아저씨와 재회했다. 우리의 만담자리에서! 오늘이 마지막 촬영이라는 걸 알려드리고, 지난번에 내가 알려준 번호가 맞았냐고 여쭤보았는데,

“참나~ 꽝~!”

말하는 아저씨의 표정을 누군가 텍스트 이모지로 옮긴다면 (네 까짓게) 딱 이런 표정이었다.

“어.. 저는 지난주에 또 4등 됐어요(사실이었다)”

아저씨의 눈이 휘둥그레지며 짜리몽땅한 나를 위아래로 두어 번 훑어보았다.

“거짓말 아니고 진짜? 그러면 번호 3개 한번 다시 불러줘 봐~”

“음… 23, 1, … 4?!” 내가 알려준 번호를 아저씨는 들고 있던 업무일지 같은 종이 뒷면에 바로 적으셨다. 아저씨는 미신을 굉장히 좋아하는 것 같았다.

“이번주는 내가 믿는 구석이 있어. 아니 얼마 전 요 앞에 횡단보도를 기다리는데, 누가 스피도? 복권을 다발로 버리는 거야. 내가 그걸 보다가 보니깐 긁은 복권도 있고, 긁지도 않은 게 있더라고. 근데 봤더니 2천 원 당첨이야.”


또 그리고 아저씨는 길에서 돈까지 주웠다며 이번주는 정말 믿는 구석이 있다고 했다. 만약 나였다면 그 일과 복권 사는 일을 별개로 봤을 테지만, 그 운이 복권 당첨까지 연결될 거라고 생각하는 아저씨였다. 좋은 일은 좋은 일을 불러온다. 언제 들어도 기분 좋은 말을 실제로 실천하는 중이었다.


2017년, 3등 당첨이 되었다며, 흘려 말하던 아저씨, 오늘 일요일인데, 이번에는 당첨되셨으려나 모르겠다. 내가 알려드린 번호는 꽝이던데…


아 그리고 1등 당첨되면 1/3은 자식에게, 1/3은 좋은 곳에, 1/3은 노년을 위해 쓰시겠다는 계획까지…

짧은 인연이었지만 기억이 강렬하다.


- 동동

촬영 마치고 청담에서 퇴근길! 차도 엄청 막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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