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택에 대해서
김밥, 떡볶이, 돈가스, 냉면… 선택지가 많아도 너무 많다!! 김밥천국 메뉴판이 동동의 머리를 삼키기 직전이다. 덮밥을 먹자니 시원한 국물이 먹고 싶고, 찌개를 먹자니 뭔가 아쉽고… 머릿 속에서 100분 토론 두 번 정도 하고 난 후 외친다. 결국 늘 먹던
“여기 치즈라면에 공기밥 하나만 주세요!”
쓸데없는 곳에 에너지를 빼지 말자 다짐하지만, 선택하는 걸 어려워하는 동동에게 결정하는 일은 쉽지 않다. 사소한 것일수록 더욱. 직장에서 “오늘은 동동이 먹고 싶은 걸로 알잘딱깔센 시켜봐~” 라는 말이 나오면 아주 환장하는 날이다. 혼자 만족할만한 메뉴도 못 고르는데, 아홉 명을 만족시킬 메뉴를 고르라니요?! 휴… 하지만 이렇게 우유부단한 동동에게도 반전은 있다. 사소한 결정 말고, 중요한 결정은 어렵지 않게 척척 해왔다는 것!
첫 번째, 동동의 고1 여름 쯤, 앞으로 진로방향을 위해 문과와 이과를 결정해야 하는 순간이 찾아왔다. 지금이야 대학 전공도 버리고 다른 일 해도 괜찮다는 걸 알지만, 그땐 문.이과를 선택하면 내 인생도 그렇게 가야할 것만 같은 중압감이 있었다. 중요한 선택 전, 주변에서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이과를 가면 미적분을 해야하고, 문과를 가면 세계사를 연도별로 외워야 하는데…’
친구들이 장고를 시작한다. 그때 동동은 당당히 외쳤다.
“선생님, 전 이과요” 화끈했다. 한껏 펼친 어깨는 남자다웠다. 이런 멋진 행동은 일상이란 듯 동동은 다음 수업 책을 가지러 사물함으로 간다. 훗.
장고를 하는 가장 큰 이유는 정답이 없는 선택지에서 최선을 위한 기회비용을 따지기 위함인데, 모든 기회비용을 이기는 압도적인 근거가 있다면, 단칼에 승부할 수 있다. 고등학생 동동에게는 교우관계가 무엇보다도 중요했다. 당시 사이가 좋지 않았던 친구가 있었는데, 그 애는 문과를 간다고 앞에서 속닥속닥하는 걸 듣고, 냅다 반대로 질러버렸다. 진로를 전혀 생각하지 않은 선택이지만, 결과는 매우 만족! 싫어하는 사람은 안 보고 사는 게 제일 마음이 편하다. 맞춰가며 사는 건 동동 스타일이 아니다. 그에 덤으로 공부도 재밌었다. 미적분을 통해 배우는 수의 세계에 나름 빠졌고, 현상에 대해 탐구하는 과학도 호기심이 갔다. 첫 번째 선택을 화끈하게 마친 후 남들처럼 동동도 시간을 쭉쭉 달렸다. 두번째 선택 전까지.
2017년 겨울 두 번째 선택의 시기가 찾아온다. 대학교 4학년이 된 동동은 대학교 도서관에서 노트북 모니터를 뚫어져라 보고 있다. 왼쪽엔 취업 희망 기업 리스트가 펼쳐져 있다. 삼성전자, 삼성전기, 현대자동차, 현대모비스, 위아, 한국공항공사… 등. 그리고 오른편엔 네이버 검색창이 켜져 있는데, 동동은 검색어를 바꿔가며 맹렬히 정보를 모으고 있다. 그런데 검색어가 수상하다. ‘작가 되는 법’, ‘방송작가 되는 법’, ‘방송작가 아카데미’, 알고리즘으로 내 취향까지 알려주는 인터넷에서 방송작가 정보 모으는 건 일도 아니었다. 모 방송사 아카데미 방송작가 과정 개강시기와 수강비까지 알아낸 동동은 경북 의성군에 살고 있는 엄마에게 전화를 건다.
“엄마, 나 기계기사 자격증 따려고 하는데, 학원비가 200만원 정도 들 것 같아. 괜찮은 회사 들어가려면 이 자격증은 기본으로 다 있어야 하거든. 엄마 200만원만 빌려줄 수 있나?”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났는지, 말 한 번 안 더듬고 동동은 또 한번 냅다 저질렀다. 그래도 양심엔 찔렸는지, 줄 수 있냐고 안 묻고, 빌려줄 수 있냐고 한 것이 참 갸륵하다. 심사숙고가 필요할 때가 분명 있지만, 이럴 땐 왠지 동동의 삘(feel), 똥삘을 믿고 싶었다.
곧 찾아온 2018년, 동기들은 연봉 3500-4000만원씩 주는 기업에 척척 줄지어 입사한 해이다. 그리고 동동에게는 단칼에 저지른 선택 때문에 나름 빡센 해였다. 평일엔 돈을 벌러 옷가게에서 아르바이트, 주말엔 돈을 쓰러 아카데미를 다녔다. 주 7일 쉬는 날 없이 일하고 공부하던 때, 상암동에 위치한 아카데미행 버스를 탈 때면 동동은 은밀한 감정이 들었다. 남들과 동동을 구분짓는 유일한 무기. 비록 지금은 아르바이트를 하는 처지이지만, 곧 누구보다도 큰 자아가 되고 말 거란 의지! 돈은 없어도 자신감은 철철 흘러 넘치던 시절이었다. 상암동을 다녀 온 날이면, 자극이 강렬해서 꼭 여행을 다녀온 것만 같았다.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 꽉 찬 9시간짜리 여행. 그 시간이 너무 알차 마음대로 흘러가던 시간을 이제야 내 손으로 꽉 움켜쥐고 발 아래로 가져다 둔 기분이었다.
아카데미 수강생에서 고대하던 막내 작가가 되는 일은 크게 어렵지 않았다. 그때부턴 누가 더 잘 버티느냐 싸움이었다. 함께 작가 일을 시작한 친구들 중 이제 두 명만 남았다. 형언할 수 없는 압박감 속에 내린 선택과 결정으로 많이 떠나갔으리라.
선택은 찰나이고, 결과는 영겁의 시간이다. 늘 호수만 둘 수 있으면 좋겠지만, 악수를 둘 때도 많다. 사실 동동이 한 선택이 모두 악수일 수도 있다. 하지만 삘에 취해 사는 인생도 나쁘지 않다. 최선을 좇지 않는 삶, 오히려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