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박을 갖기 전, 어떻게 식사를 했었더라
무엇이든 '한 번에' 해결되는 건 없다. 그렇기에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도 여전히, 식이 강박과 운동 강박의 잔재가 남아있다. 클린하게 먹으면 괜히 뿌듯하고, 하루 1만보 이상 걷거나 운동을 한 날엔 식사에 있어서 나에게 꽤 관대해진다. 그럼에도 이전보단 조금씩, ‘~해야 한다’는 마음가짐으로부터 서서히 해방되고 있는 것 같다. 그 과정을 이렇게 글로 남기면 앞으로 더 강박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 식사와 운동에 대한 부담을 내려놓았던 이야기를 기록해본다.
식이 강박을 갖게 되면서 가장 힘들었던 건 어쩌면 나의 혀였을지도 모른다. 세상엔 정말 맛있는 음식들이 많은데, 당이 많다고, 지방 함량이 높다고, 칼로리가 부담된다는 이유로 스스로 그걸 제한해버렸으니 말이다. 하지만 ‘풍선효과’라는 말처럼, 클린하게 먹을수록 내 입은 더 강렬하게 디저트를 갈망했다. 생각해보면 바디프로필을 준비하기 전의 나는 빵보다 밥, 양식보다 한식을 훨씬 더 좋아했다. 한 끼 든든하게 밥을 먹으면 디저트 생각도 별로 나지 않았고, 단맛을 그리 즐기지도 않았으니까. 그런데 무월경 기간 동안엔 빵, 초콜릿, 아이스크림 같은 음식이 유독 당겼다.
처음엔 식사빵 정도만 허용하고, 케이크나 도넛은 먹고 싶어도 애써 참았다. 건강검진에서 콜레스테롤 수치가 높게 나왔다는 '명분'도 있었고, 나름대로의 절제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점점 느꼈다. 이렇게 계속 참기만 해선 강박의 고리를 끊을 수 없겠구나. 그래서 한 입, 두 입 먹기 시작했다. “혈당도, 콜레스테롤도 나중에 관리하면 돼. 지금은 무월경 극복이 먼저야.” 그렇게 스스로를 다독이며 불안을 잠재웠다.
디저트를 잘 먹지 않는 애인도 내가 먹고 싶다고 하면 기꺼이 함께 해줬고, 가족들도 아이스크림이든 케이크든 '같이' 먹어주었다. 그래서인지 (물론 아직도 마음 한구석에 남아있긴 하지만) 먹는 것에 대한 죄책감이 예전보다는 많이 줄었다. 그럼에도 확실한 건, 먹고 싶은 걸 먹었더니 단 음식에 대한 욕구가 줄어들었다. 요즘엔 단 것과 빵에 그다지 욕심이 나지 않는다.
'면이나 빵보다는 밥을 먹자'는 생각도 도움이 되지 않았을까 짐작해본다. '예전의 식습관으로 돌아가면 몸도 마음도 안정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라는 마음으로 의도적으로 밥을 찾았다. 바디프로필 이전의 나는 확실히 한식파였으니까. 간단히 먹고 싶을 땐 샌드위치 대신 김밥이나 유부초밥을 먹었고, 두 끼 모두 쌀이 들어간 음식으로 먹으려 노력했다. 신기하게도 밥을 충분히 먹은 후엔 디저트를 떠올릴 일이 거의 없었다. 아, 이래서 몸의 자연스러운 흐름을 믿어야 하는구나 싶었다.
가장 효과적이었던 건 아무래도 여행지에서의 식사였다. 4월 말에서 5월 초, 약 일주일간 파리 여행을 다녀왔는데 우선 맛있는 음식이 너무 많았고 (...) ‘여기까지 왔는데 다 먹고 가야지!’ 하는 마음가짐도 있었기에, 먹는 데 큰 죄책감이 들지 않았다. 회사 일이 여행 직전까지 너무 바빴고, 여전히 무월경으로 인한 불안이 내게 크게 자리 잡고 있었던 걸 엄마는 잘 아셨던 걸까. "파리 가서는 아무 생각 말고 푹 쉬고, 맛있는 거 많이 먹고 와"라는 엄마의 한 마디가 참 마음을 울렸다.
'파리' 하면 역시 빵. 아침부터 빵을 잔뜩 먹었고, 다양한 음식도 배불리 즐겼다. 여행지 특성상 많이 걷기도 했고, 무엇보다 그 시간만큼은 죄책감 없이 먹고, 걷고, 쉬었다. 어쩌면 그런 '휴식'이 월경을 되찾는 데 큰 역할을 했을지도 모르겠다. 물론 돌아와서 체중에 대한 걱정을 안 했다면 거짓말이다. 그래도 어느정도 마음의 각오를 했는데, 오히려 빠져있어서 놀랐다. (물론 금방 다시 돌아왔다^^.. 그래도 신경 안쓰려고 노력했다. 체중을 안 재는 게 나았을지도 모르겠다.)
파리에서 친구와 와인을 곁들여 피크닉을 하며 보내던 평화로운 오후들, 그 모든 장면이 아직도 마음속에 선명하게 남아 있다. 무엇을 먹을지도, 어떻게 보여야 할지도 고민하지 않고 하루하루를 온전히 즐겼던 시간들 덕분에, 내 안의 '먹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조금은 옅어졌던 것 같다.
아직도 어떤 음식 앞에서는 망설이고, 거울 앞에서 내 몸을 복잡한 시선으로 바라볼 때도 있다. 하지만 예전처럼 스스로를 다그치기보단, 그 순간의 감정과 반응을 들여다보려 노력한다. 강박은 완전히 사라지진 않았지만, 그걸 인식하고 있는 지금의 나는, 분명 그때보다 더 자유롭다. 이 글을 읽고 있을 나의 또 다른 어느 날이, 지금보다 조금 더 평화롭고 관대한 날이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