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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광 Aug 30. 2016

‘시지프스의 형벌’ 같은 삶이란

반삭머리 아저씨와 노가다하며 떠올린 단상들

#원죄(原罪·original sin)
 
“사는 게 죄다. 사는 게 죄야.”
 
반삭머리 아저씨가 언덕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저 언덕을 어느 세월에 다 올라가냐. (한숨) 계단 봐라. 끝도 없다. 그래도 어쩌겠어. 먹고살려면 해야지. 여기서 담배나 피우자.”


반삭머리 아저씨는 계단 앞에 쭈그리고 앉아 담배를 꺼냈다. 언덕과 계단을 다 올라가는 동안 우리는 담배를 한 번 더 피워야 했다. 안개인지 연기인지 모를 것이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사는 게 죄라는 아저씨. 아저씨는 매일 ‘시지프스의 형벌’을 받는지도 모른다. 먹고사는 일의 무게는 시지프스가 밀어올린 바위의 무게에 버금가는지도 모른다.
 
 
 
#새우탕
 
7시30분까지는 아직 1시간도 더 남은 때였다. “7시30분까지 현장으로 나오라”는 말은 ‘아침밥은 알아서들 챙겨먹고 나오라’는 의미다. 우리는 인력대기소에 나와서 일거리를 받 움직이는 사람들인지라 집에 들렀다 나올 수도 없는 노릇이다. 6천원, 7천원씩 들여가며 백반을 사먹기에는 돈이 아깝다. 일당을 받기도 전에 써버리는 기분이 드는 탓이다. 발길이 향하는 곳은 결국 편의점이다. 반삭머리 아저씨는 곧장 새우탕 하나를 집었다. 나는 새우탕 하나와 요구르트 한 줄을 샀다. 바깥 테이블에 자리 잡고 앉아서 면이 익기를 기다렸다. 우리는 빈속에 컵라면을 욱여넣었다.
 
옆 테이블에 한 남자가 앉아 있었다. 그는 편의점 바로 앞에 있는 공사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따금 자리에서 일어나 공사장을 기웃거렸다. 빌라 건물 앞에는 흙더미가 쌓여 있었다. 작은 포크레인 한 대가 그 옆에 세워져 있었다. 옹벽이 막고 있던 흙이 파헤쳐진 상태였다. 옹벽은 담장처럼 드러난 모양이었다. 나와 반삭머리 아저씨는 그의 모습을 보는 듯 안 보는 듯 신경쓰고 있었다. “우리처럼 일하러 나온 인부는 아니고, 우리에게 일 시키는 사람”일 것이라고, 반삭머리 아저씨와 나는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옹벽: 땅을 깎거나 흙을 쌓아 생기는 비탈이 흙의 압력으로 무너져 내리지 않도록 만든 벽. ‘축대 벽’으로 순화.
 
나는 옆 테이블 아저씨에게 말을 걸었다.


“오늘 일하는 거, 사람 부르시지 않았어요? 여기 요구르트좀 드세요.”


그의 엄지손가락은 75ml짜리 요구르트병만했다.


“고마워요. 잘 먹을게요. 내가 부른 건 아니고, 아무래도 김사장이 부른 것 같은데. 기다려 봐요. 곧 있으면 올 거예요.”
 
 
 
#전화
 
“안녕하세요, 사장님. 일 나온 사람입니다. 오늘 ㅅ인력소에서 사람 부르셨죠? 예, 지금 공사장 앞입니다. 금방 오신다구요? 예, 그러면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1.5톤 트럭 한 대가 와서 멈췄다. 차 옆에는 ‘ㄱ종합설비’라고 써 있다. 운전석 문이 열렸다. 50대 후반에서 60대 초반으로 보이는 아저씨 한 분이 내렸다. 엄지손가락이 요구르트병만하던 아저씨가 “김사장”이라고 부르던 분이다. 방금 통화했던 사장이시다. 설비사장은 엄지손가락이 굵은 아저씨를 “영국신사”라고 불렀다.
 
 
 
#배부른 담장
 
영국신사 아저씨가 말했다.
 
“이번에 비가 많이 내렸잖아? 그것 때문에 담장이 배가 불러버렸어. 그게 무슨 소리냐고? 여기 봐봐. 담장이 불룩 튀어나왔지? 여기 집주인이 창문 너머로 담당을 보더니 놀라서 구청에 민원을 넣었잖아. 우리가 그래서 공사하는 거 아니야. 구청에서 일거리를 받았잖아. 여기가 산자락인데 언덕 그대로 집들을 지어대니까 생긴 일이지. 이게 원래 담장이 아니거든. 옹벽이야. 흙 무너지지 말라고 쌓아 둔 거잖아. 이게 이 집한테는 담장이지만 저 집한테는 옹벽인 거지. 내 말 알아들어? 자네들은 무슨 일을 하면 되냐고? 이 양반 말귀를 잘 못 알아먹네. 저 옹벽, 저거 담장을 허무는 게 오늘 해야 할 일이지. 바로 옆에 집이 있어서 골치 아파. 도시가스며 창문이며, 남의 집에 피해 안 가게 일을 해야 하니까.”
 
 
 
#함마드릴
 
“몇 살이야? 스물여섯? 일은 좀 해봤어? 노가다 왜 하는 거야? 아르바이트로 한다고? 좋지. 그런데 ‘함마드릴’은 쓸 줄이나 알아? 모른다고? 아이고, 오늘 저 양반만 죽어나가게 생겼네. 김사장, 오늘 계탔네. 여기 이 친구 함마드릴도 못 쓴다네. 이런 사람 데리고 어떻게 일을 하나. 김사장, 오늘 자네만 죽어나게 생겼어. 나는 오후에나 일 도와줄 수 있어. 3시 넘어서 오겠네. 오늘 점심 때 손주 돌잔치가 있어. 마누라한테 '돌잔치는 무슨 돌잔치냐'고 '일하러 가야 한다'고 말했더니 집에 들어올 생각 하지 말라네. 어쩔 수 없이 자리나 지키다 와야지. 아무튼 오늘 고생좀 하겠어. 이따가 오후에 보세.”


영국신사는 유유히 사라졌다.
 
나는 영국신사 아저씨의 유도심문에 당한 꼴이었다. 그는 처음부터 나를 탐탁치않게 여겼던 모양이다. 익숙한 질문들이었다. 나이 어린 사람이 노가다하고 있으면 흔히 물어오는 질문이었다. 여기에 내가 별 생각 없이 답했던 게 화근이었다. ‘기술은 없지만 열심히 일하겠다’는 의미로 영국신사에게 말했지만, 이것으론 턱없이 부족했다. “어린 사람이 이런 일도 하러 나오고 대견하네”라는 말을 기대했던 나로서는 적잖이 당황스러웠다. ‘일도 할 줄 모르는 사람이 이런 데는 왜 나왔냐.’ 그의 눈빛이 내게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나는 한순간에 죄인이 됐다.
 
 
 
#노가다도 식후경
 
할아버지 한 분이 우리를 구경하고 있었다. 연세가 70은 족히 넘어 보였다. 집이 근처라신다. 설비사장과 영국신사와도 친분이 있는 모양이었다. 집에만 누워 있기가 심심해서 나왔단다. 옆에서 일좀 거들고, 이야기도 나누고, 일당도 약간은 받으면, 심심하지 않고 얼마나 좋냐는 게 할아버지의 말이었다. 경로당에 앉아 있으면 괜히 몸 이곳저곳이 안 아픈 데가 없단다.
 
할아버지가 잠깐 사라졌다. 나타나서는 일하고 있는 우리에게 커피나 마셔보라고 말했다. 본인이 직접 타온 거라며, 어서들 오라고 말했다. 김사장은 “나는 커피 안 마셔요”라고 대꾸했다. 할아버지는 못마땅한 듯 입맛을 다시더니 이렇게 말했다.


“니미 씨벌, 일이야 맨날 하는 거고. 이리 와서 냉커피나 마셔. 늙은 놈이 탄 거라 맛이 좋을겨. 일도 먹고 해야지. 다 먹고살려고 하는 건데.”


김사장이 웃으며 하던 일을 멈추고 할아버지에게 갔다. 할아버지는 종이컵에 냉커피를 넘치도록 가득 따라서 건넸다.
 
 
 
#누군가는 더 힘들다
 
내가 힘들지 않다면 같이 일하는 누군가는 그만큼 더 힘들다. 여러 명이서 무거운 물건을 들고 있는데도 나는 별로 힘이 들지 않는다면 다른 누군가가 그만큼 더 힘을 쓰고 있는 셈이다. 일은 나 혼자서 하는 게 아니다. 같이 하는 것이다. 내가 받은 일당일지라도 온전히 나만의 노력으로 얻어낸 대가는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랑 같이 일하는 사람은 더 힘들게 일하고 같은 일당을 받는다.
 
 
 
#아무것도 할 줄 모르는
 
일을 끝마치며 영국신사가 초 치는 소리를 했다.
 
“아, 진짜 답답하네. 아무것도 할 줄 모르는 사람을 보내면 어떡해? 이럴 줄 알았으면 내가 철거만 전문적으로 하는 사람들 불러다 썼지. 그 사람들 왔으면 우리가 이렇게 힘들이지 않고도 자기들끼리 반나절 일하면 다 끝냈을 텐데. 일도 얼마나 깔끔하게 잘하는데. 함마드릴도 쓸 줄 모르지, 그라인더도 쓸 줄 모르지, 그럼 할 줄 아는 게 뭐야? 김사장, 그만하고 가세. 이제 거의 다 했으니까 남은 건 내일 정리하게.”
 
정작 하루종일 같이 일한 김사장은 별 말이 없었다. 하루 일과도 다 끝난 마당에 아쉬운 소리를 하는 영국신사가 몹시도 미웠다. ‘노가다도 어디서 인턴부터 시작해야 하려나.’ 나 같은 사람은 어디서도 환영받지 못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다 그런 거야
 
반삭머리 아저씨가 내게 12만원을 건넸다. 아저씨는 담배에 불을 붙이며 내게 말했다.
 
“오늘 일당으로 12만원씩 받았어. 아까 그 사람이 나 보고는 내일도 나오라고 했어. 오늘 일이 힘들었지. 그렇다고 해서 내일 여기 말고 다른 데로 일 나가면 거기는 일이 더 쉽나? 꼭 그렇지도 않아. 거긴 더 힘든 일이 있을 수도 있지. 어차피 노가다하면 안 힘든 일이 없어. 원래 다 그런 거야. 사는 게 다 그래. 오늘 자네도 애썼어. 아까 그 사람이 그렇게 말하면 안 되지. 젊은 사람이 어떻게든 일해보겠다고 나와서 열심히 했는데 마지막에 그런 아쉬운 소리를 하면 쓰나.”
 
 
 
#밑바닥 인생
 
반삭머리 아저씨의 말.
 
“나중에 뭐 하려고? 아... 그래? 그 일 하는 사람들은 상류사회 인생이지. 열심히 해서 꼭 잘되길 바라네. 여기는 말이야, 여기 노가다판은 완전히 밑바닥 인생이야. 인력대기소에 나오는 사람들 거의가 한심한 사람들이야. 기껏 돈 벌어서 술 처마시고. 그러다 돈 떨어지면 다시 일하러 기어나오고. 그런 생활의 반복이지. 그 돈 벌어서 장사라도 한다든지, 다른 일 할 생각을 해야지, 그렇게 의미 없이 살면 안 돼. 자네는 꼭 열심히 해.”
 
 
 
#경력
 
“일하신 지는 얼마나 됐어요?”
 
나는 반삭머리 아저씨에게 물었다. 하지 말았어야 할 질문이었다. 아저씨는 한숨을 내쉬었다. 나는 별 뜻 없이 물었지만, 아저씨에게는 뼈아픈 물음이었다. 아저씨는 담배연기에 대답을 실어보냈다.
 
“나도 꽤 됐지. 벌써 나이가 쉰셋이야. 나도 뭐 할 말은 없지. 젊어서 허튼 짓 많이 했어. 얼른 여기서 벗어나야 하는데...”
 
 
 
#끼워팔기

 

퇴근하고 인력소. 수수료를 낸다. 계좌이체로 해도 되지만 괜히 얼굴도장이라도 한 번 더 찍는다. 비록 내가 일도 못하는 초보지만 앞으로도 일거리 잘 달라는 의미로. 일당의 10%에 달하는 수수료를 건네받을 때에만 인력소장은 친절했다.


“내일도 나오죠? 내일은 5명이서 일하러 가는 곳에 따라가면 되겠네요. 어려운 일 없을 거예요.”


소장은 나를 끼워팔 작정이었다.
 
 
 
#결산

 

일당 12만원
일비 1.2만원
순익 10.8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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