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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광 Mar 20. 2017

견딜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참으라면 참겠지만 견디지는 못하겠다

영화로 제작된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의 포스터


밀란 쿤데라(Milan Kundera)의 소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읽어보셨나요? 작품의 완성도도 뛰어나거니와 그 서술 방식 또한 독특해서 많이 회자된 책입니다. 워낙 유명한 작품인지라 직접 읽어보지는 않았어도 제목만큼은 원체 많이 들어봤기에 이미 읽어본 듯한 착각까지 들곤 하죠. 제가 그렇답니다.

제가 아는 것이라곤 책의 제목과 저자의 이름뿐입니다. 작품의 요약본과 그 시대상을 접했을지라도 한 문장 한 문단 직접 읽어본 것만 못한 것은 당연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한 가지 의문점을 가졌습니다. 바로 제목에 관한 의문입니다. '존재의 가벼움'을 참을 수 없다는 말이 저는 어색했습니다. 차라리 견딜 수 없겠다는 표현이 제게는 와 닿았습니다.

제가 생각하는 '참다'와 '견디가'는 이렇습니다. 참는다는 것은 일시적입니다. 순간의 슬픔을 억누르고 참는 일은 어려울지라도 가능합니다. 반면 견딘다는 것은 지속적입니다. 어려운 상황에서도 차마 굴복하지 못하고 버티고 견딘다는 것은 어떤 점에서 시지프스 신화를 연상케 합니다. '존재의 가벼움'은 참아내는 것이 아니라 견뎌내는 것이라고 표현하는 게 적절하다고 생각하는 이유입니다.

아래는 불어판, 영어판, 일어판 제목입니다.

- L’insoutenable légèreté de l’être
- The Unbearable Lightness of Being
- 存在の耐えられない軽さ

그리고 아시다시피 현재 한국어판 제목은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입니다.


각각의 제목은 모두 '존재' '가벼움' '참을 수 없는' 등 3가지 의미단위로 이뤄져 있습니다. 어떤 의미단위에 방점이 찍혔는지에 따라 제목도 다르게 읽히는 것 같습니다. 말하자면 '참을 수 없는'이라는 말이 '존재'에 걸리는지, 또는 '가벼움'에 걸리는지에 따라 제목이 다른 의미로 다가온다는 것입니다.

불어판, 영어판, 한국어판의 제목은 대체로 비슷합니다. 불어판과 영어판 제목을 거칠게 직역하면 '참을 수 없는 가벼움, 존재의'가 됩니다. 이를 부드럽게 번역하면 우리에게 익숙한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 되겠죠.

일본어판 제목이 특이합니다. '존재의 참을 수 없는 가벼움' 혹은 '존재의 견딜 수 없는 가벼움' 정도로 번역이 될 것 같네요. 일본어와 한국어는 어순이 같다고 들었습니다. 한국어판과 어순은 같되 표기방법만 다르게 제목을 번역하는 것도 충분히 가능했겠지요. 그럼에도 '존재'를 앞세운 건 어떤 이유였을까요. 원제를 거칠게 직역했기 때문이었을까요, 아니면 오해의 여지 없이 '존재'에 방점을 찍고 싶었기 때문이었을까요.

마침,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라는 제목과 관련된 내용이 언급된 글이 있어 아래에 첨부합니다. 한국 최초 체코어 번역본의 제목은 <존재의, 견딜 수 없는 가벼움>이었다고 하네요.


관련기사: [정은숙의 내 인생의 책] (4) 존재의 가벼움| 밀란 쿤데라 (출처 경향신문)

[정은숙의 내 인생의 책](4) 존재의 가벼움| 밀란 쿤데라

고국 체코의 ‘프라하의 봄’에 공직에서 해직당하고 저서가 압수되는 수모를 겪은 쿤데라는 프랑스에 정착, 세계적인 작가가 되었다. 그를 세계에 알린 대표작이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다. 그런데 이 소설처럼 오해를 많이 낳고 있는 소설도 없다. 제목에 대해서도 의견이 분분하다. 1980년대 한국 최초 체코어 번역본 제목은 <존재의, 견딜 수 없는 가벼움>이다. 현재 구입할 수 있는 민음사판 제목은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다. 그러니까 전자는 ‘존재’에, 후자는 ‘가벼움’에 방점이 찍힌다. 이 해석은 이 소설을 이해하는 데 큰 간극을 낳는다. 전자는 ‘존재의 가벼움은 견딜 수가 없다’ 정도의 산문적인 문장으로 풀 수 있다. 후자는 ‘존재는 가볍다’ 정도가 된다. 존재의 값이 한없이 떨어진 것, 인간이라는 존재가 가벼운 것이 아니라 존재의 의미가 가볍게 된 상황을 직시한 것이 이 소설이라는 게 내 생각이다. 쿤데라는 니체의 영원회귀 사상에 대한 성찰로 작품을 시작하는데 이는 모든 일들이 무한히 반복된다고 하는 ‘우스꽝스러운 신화’에 대한 분석이기도 하다. 그는 이 영원회귀 사상을 삶의 일회성에 대비하면서 한 번 사라지면 두 번 다시 돌아오지 못할 인생의 의미에 대해서 묻는다. 만약 정말 한 번뿐이라면, 인생이란 하나의 그림자에 지나지 않으며 아무런 무게도 없고 처음부터 죽은 것이나 다를 바 없지 않겠느냐는 것. 그러기에 인간은 자신의 삶뿐만 아니라 역사의 주인이 되기 위하여 불멸을 꿈꾸는, 부질없는 시도를 하지 않는가 하고.

news.khan.co.kr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은 제목 하나만으로도 깊게 생각해보는 자세가 요구되는 작품인 것 같습니다. 참을 수 없는 것인지, 견딜 수 없는 것인지. 둘 중 무엇이 됐든 우리가 참거나 견디지 못하는 것은 '존재'의 가벼움 탓인지 '가벼운' 존재 탓인지.

제목에 국한된 이러한 의식의 흐름은 아마도 책을 읽어보지도 않았기 때문에 나타나는 것이겠지요. 역시 책을 읽어야겠습니다. 언젠가 일상의 중력을 견디지 못할 것 같은 그런 날이 제게 찾아오거든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꺼내 들어야겠습니다. 어떤 문장에서 저만의 오독(誤讀)을 하게 될지 기대됩니다.

이상으로 책을 한 페이지도 안 읽어보고 쓴, 표지 겉핥기에 충실한, 가장 피상적인 북리뷰를 마칩니다. 직접 책을 읽고 생각이 익으면 그때 또 리뷰를 쓰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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