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서도 '고기'라고 불리는 물고기에 대하여
세상의 모든 호명에는 음흉한 욕심이 감추어져 있을지도 모른다
ㅡ<명태>(김주대 시인) 中
한때 '게슈탈트 붕괴'라는 말이 유행이었습니다. 게슈탈트 붕괴는 특정 대상에 대한 과몰입으로 인한 망각 현상을 일컫습니다. 일본에서 만들어진 개념으로, 정식 학술용어는 아닙니다. 하지만 자못 비범해 보이는 '게슈탈트'와 '붕괴'라는 두 단어가 나란히 놓이면서 왠지 유명한 심리학 저널에 등재됐을 것만 같은 느낌이 들지요.
모두들 한 번씩은 경험해보셨을 듯합니다. 익숙했던 대상이 갑자기 너무도 낯설게만 느껴지는 그런 순간들을 말이죠. '냄비는 왜 냄비지?'라거나 '뚜껑은 왜 뚜껑이지?' 같은 엉뚱한 고민에 진지하게 빠져든 적이 있으실 거라고 생각합니다. (저만 그런건가요?)
제가 특히 자주 잃어버리는 낱말이 있습니다. 바로 '물고기'입니다. 읽을 때마다, 들을 때마다 낯섭니다. 물,고기, 라니.
처음 '물고기'라는 낱말에 의문을 품은 것은 중학교 2학년 때였습니다. 봄이었습니다. 하굣길, 저는 개천을 지나고 있었습니다. 봄바람이 불었고 벚꽃잎이 분분했습니다. 분홍색 꽃잎이 유유히 개천을 따라 흘렀습니다. 발걸음을 멈추고 그 모습을 지켜봤습니다. 작은 물고기 몇 마리가 꽃잎 밑으로 헤엄쳐 와서는 그 주변을 빙빙 돌다 주둥이를 꽃잎에 갖다댔습니다. 아마도 물고기가 꽃잎을 먹이로 착각했던 모양입니다.
그때 제 의식의 흐름은 이랬습니다. '물고기가 꽃잎을 먹으려 한다. 물고기가 꽃잎을 먹는다. 물고기가 먹는다. 물고기가... 물고기? 물, 고기? 고기가 물에서 헤엄친다? 살아 있는 고기? 물고기는 왜 물고기지?' 이런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계속 이어지는 하굣길이었습니다.
중학교 2학년짜리가 나름대로 근원적이고도 심오한 고민을 거듭한 끝에 결론을 내렸습니다. '그들은 배가 고팠던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물고기를 물고기라 부르기 시작했던 것이다.'
물고기가 아직 '물고기'라는 이름을 가지지 않았던 어느 먼 옛날을 상상했습니다.
신석기 시대, 수렵과 채집으로 끼니를 해결하던 그 시절, 사람들은 항상 배가 고팠다. 어느날 사람들이 물가를 무리 지어 거닐고 있었다. 그들은 물고기를 발견했다. 호기심 많은 누군가가 물에서 헤엄치는 그 생물을 포획했다. "불에 구워보자." 다른 누군가 제안했다. 당시는 사람들이 '불맛'을 알아가던 시절이었다.
물고기는 비늘의 물기가 채 마르기도 전에 불 위로 옮겨졌다. 타닥타닥, 치지직. 물고기의 겉면이 노릇노릇해지면서 몸통에서 흘러나온 기름이 장작에 떨어졌다. 고소한 냄새가 퍼졌다. 곳곳에서 침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이것이 먹어도 괜찮은 것인지 확인하기 위해 용감한 누군가가 먼저 물고기를 맛봤다. 그가 물고기 살점을 우물우물하다 삼키고 말했다. "고기! 고기 맛이 난다!"
바로 그 시점부터 사람들은 물고기 맛을 알아버렸다. 이제 그들은 물에서 헤엄치는 생물을 볼 적마다 고기맛을 떠올렸다. '고기가 헤엄친다.' 물의 질감을 온몸에 새긴 채 물속을 헤엄치는 생물을 보고도 사람들은 '고기'를 생각하게 된 것이었다. 그렇게 물고기는 살아생전 자기(自己)로서 불리지 못하고 잠재적 음식이 되어버렸다.
물고기가 비로소 '물고기'라고 불리기 시작한 것은 아마 이런 배경 때문이었을 것이라고, 저는 짐작했습니다. 지금도 '물고기'라는 단어를 보고 들을 때마다 자꾸만 낯선 기분이 드는 것은 12년 상상의 여파가 큰 탓인가 봅니다.
살아있는 고기라니. 재밌는 표현입니다. 이제는 배고픔이란 게 드물어진 시대를 살아가기 때문일까요? 물고기를 보면서 고기를 떠올린다는 게 한없이 이상하게만 느껴지는 것은 저만 그런가요?
아래는 김주대 시인의 '명태'라는 詩 전문입니다.
살아 있을 동안 너는 어떤 이름으로도 살지 않았다
물결의 부드러운 허리를 물고 힘차게 지느러미를 흔들던
너는 푸른 파도였고 끝없는 바다였다
수평선 위로 튀어오르는 무명의 황홀한 빛이기도 하였고
어느날 명태,라는 이름의 언어가
너의 깊은 눈에서 바다를 몰아내고 파도인 너를 음식으로 만들어버렸다
그후로 너의 입과 눈에서 죽음의 냄새가 진동하였다
명태라는 이름은 너의 주검을 요리하고 싶은 욕망이었던 것이다
그러고 보면
세상의 모든 호명에는 음흉한 욕심이 감추어져 있을지도 모른다
가령 누가 벗이여,라거나 사랑해,라고 말하는 것이
그 죽음을 제 입맛에 맞게 요리하고 싶다는 얘기는 아닐는지
(김주대 시인)
ㅡ『그리움의 넓이』(2012), 창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