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망이 아닌>
아주 잠깐 일상에서 벗어난 우리
누구 하나,
우리를 전혀 모르는 곳으로
도망치고 싶었다.
학교도, 숙제도,
온갖 피로한 일상과 상처도
잠시 내려놓고
떠나고 싶었다.
관광지가 아닌 조용한 곳.
답답한 호텔 대신
수영장이 있는 작은 숙소.
아이들도 나도
항상 같이 있기를 바랐으나
하루 종일 같이 있는다면
우리끼리 고립될 것 같았고
이런저런 생각 끝에
숙소와 어학원이 한 곳에 있는
필리핀 세부로 결정했다.
관광지라 걱정됐지만
대신 규모가 작은 곳으로 결정했고,
준비할 시간이 부족했기에
후회하지 않기로 했다.
어디든, 지금보다는 나을 것이라 생각했다.
세부 막탄 하늘은 설렘이라는데,
진짜다.
이렇게 파란 하늘,
이렇게 빛나는 햇살이
아직 존재한다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아침마다 숙소로 출근하며
‘굿모닝’ 인사를 건네는
아떼와 꾸야가 처음엔 낯설었지만
이젠 익숙하다.
아떼는 이모, 꾸야는 삼촌이라는
말이다.
영호와 윤호도 금세 적응했다.
만나면 춤부터 추는 선생님들과 함께하는 시간은,
말이 통하지 않아도 웃음은 통한다는 걸 알려줬다.
물론 불편함도 있었다.
남편 없이 아이 둘을 돌보는 건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필리핀의 물은 정수되지 않은 지하수라
여행자에게는 주의가 필요하다.
그래서 물을 마실 때도, 씻을 때도,
양치할 때도 구분해서 사용해야 했고.
지프니를 타고 간식을 사러 가는 길은
덥고 복잡하고 숨이 찼다.
하지만 그 불편함보다,
이곳의 따뜻함이 훨씬 컸다.
아참,
세부에 가려 짐을 싸기 며칠 전
친한 언니가 집에 옷 한 보따리를 가져다줬다.
수질이 한국과 달라
세제가 강력한 세부에서는
옷감이 금방 상한단다.
세부에서 입고 버리고 오라며
여름옷을 보내줬다.
나를 응원해 주는 누군가의
첫 마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