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록은 허락 없이, 조용히 오래 남는다.

<도망이 아닌>

by 이두래

기록은 허락 없이, 조용히 오래 남는다.


나는

세부에서 돌아왔다.

일상을 찾았다.

작가로 돌아왔다.

진실을 찾았다.


우리를 만들어진 이야기 속에 살게 하고

도망가게 했던 이들을 방관했던,

모르는 척이 편했던,

책임을 져야만 했던,

누군가를 찾아갔다.


침묵으로 일관하던 내가

1년이 지나서야 힘겹게 찾아간 건,

또다시 같은 사건이 반복됐기 때문.


방관의 힘은 강력하다.

잘못을 해도 그냥 지나가면

해도 되는 줄 학습하게 한다.


우린,

트라우마가 일어났고

가까스로 지켜온 일상이었기에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그들은

문을 열고 들어오는 나를

쉴 새 없이 조롱했다.

그들은

알지만 '모르는 척'해야만 했다고 했다.


아니요, 반드시 알아야 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몰랐으며,

몰라서 죄가 됐습니다.


나에게 말장난은 통하지 않았다.

나는

글이 직업이다.


나는 조용히,

아주 낮게,

모든 걸 기록했다고 말했고

계속 기록하고 있으며

이런 내 행동에 대해

허락을 받으러 온 게 아니라고

선언했다.


그들은

내가 아직은 어려, 잘 모른다며 웃었고


나는

내가 어디까지 알고 있을 거 같냐고

되물었다.


그리고

이미 나이가 많으니, 내가 못하는 게 아니라

안 하는 거쯤은 눈치챘을 거라 믿는다 했다.


나보다 사회적 지위가 높다고

으스대는 그들에게

나 역시 사회적 역할을 공개하며

내가 져야 하는 책임과 소명을 다할 것임을,

해야 할 일은 해야겠다고 으스댔다.

사람대 사람이 아닌

피해자와 가해자가 아닌

직업대 직업으로

높고 낮음을 구분하는

그들에게, 내 경력은 도움이 됐다.


내가 그토록 고단하게 버텨왔던 시간이

이렇게 기분 나쁘게

인정(?) 받을 줄은 몰랐다.


글을 쓰고, 기록하고, 전파하는

사람에겐 힘이 있다고

믿는 듯했다.

그들은

왜 이제야

(내 직업을) 말하느냐며

나를 탓했다.


나는

뭐가 더 달라질까요-?

라고 대답했다.


1년 전으로 돌아가시라.

그리고 해야 할 일을 다시 하시라.

그렇다고 한들

잘못이 사라지는 건 아니기에


그러니

나는 지금처럼 이대로

변함없이 기록하겠다고

말하고 또 말했다.


나는

그들에게

내 기록의 일부를 전달했다.


내 문서가 어느 정도의 효력이 있는지

이미 자문을 받았다.


기록의 나머지는

글쎄,

언제쯤 어디에

공개를 하면 좋을까요?


자꾸 전화가 온다.

휴.


갑자기 우린

다 같은 어른이란다.


나는 분명히 말했다.

늦었지만 '어른'으로서

해야 할 일들을 하시라고.

잘못은, 알고도 사과하지 않는

순간부터 더 크게 자란다고.

마찬가지다.

벌써 몇 배나 불었다.


누군가 만든 거짓 속에,

시시덕 거리며

나와 아이의 이름을 입에 올리며,

아무런 상관없는 사람들이

네까짓 게 뭐냐며 손가락질을 하고

무턱대고 전화를 걸어 소리를 질렀던,

이런 상황이 재밌다고 내 앞에서

낄낄거리며 말했던 사람들은

왜 지금은 내 번호를 누르지 않는 걸까.

이렇게 과묵했었다고?


아이에겐

그동안 침묵해서 미안하다고 말했다.

그게 너를 지키는 것이라 생각했지만

엄마가 다 틀렸다고.

어린 너를, 작은 너를,

도망가게 해서 미안하다고 말했다.


하지만 엄마는 진실을 바로 잡았으며

잘못한 이들은 벌을 받았고

또 받는 중이며,

책임이 있으나, 방관했던 어른들에겐

어떠한 잘못을 얼마만큼 했는지

조목조목 알려주고 왔으니,

이젠 어깨를 조금은 펴고

땅이 아닌 앞을 보고 걸었으면

좋겠다고 했다.


아이는 말한다.


우리 엄마가 누군 줄 알고?


우리 엄마가 말이야,

방송 작가였어.

TV화면 마지막에 이름이 나왔고,

이젠 책 마지막에 이름이 나올

사람이야!


- 라며

식탁을 탁 친다.

우리 영호가 말이다.

요즘

나한테 허세를 배웠다.


...


그리고

나한테 미안하다고 했다.


엄마가 나 때문에

일을 안 하는 거 같아서

나는 잘못한 게 없는데도

그게 참, 엄마한테 미안했어.


이젠

나보다 5kg쯤 몸무게가 더 많이

나가는 아들이,

지켜줘서 고맙다고



웃는다.

아직, 제 마음속엔 작은 아기랍니다.


나는 더 많이 웃고

더 많이 울고

아이품에 꼬옥 안긴다.

나는 그런 엄마다.



아이는

조심스레 하얀 종이를 꺼냈다.


"엄마 나

받아쓰기 70점 받았어.

작가 아들인데, 그럴 수 있잖아?

나는 작가가 아니니까."


갑자기 독립을 선언한다.


나는 이두래가 아닌

내 진짜 이름으로 받아쓰기 종이에

사인을 한다.


우리는

자연스럽게 일상으로 복귀했다.



#작가노트

언젠가

제 글이 출판사와 계약을 하고

이두래라는 이름으로

누군가에게 전해질 날이

오면 얼마나 좋을까요 :)


아이들의

70점, 80점

이따금씩 100점이 적힌

시험지에 확인 사인을 하는

일상도 너무나 감사한 요즘,

작은 꿈과 소망을 가져봅니다:)


엄마이기 전에 작가였으니까요.

저도 독립을 선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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