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차에서

by 소정

기차에 탈 때마다 엄마를 떠올리는 순간이 온다.


엄마는 딸 얼굴 보러 온 외할머니의 짐을 실어주러 같이 기차에 올랐다가, 다시 내리기 전에 기차가 출발하는 바람에 다음 역까지 다녀온 적이 있다. 그때는 그냥 웃어넘긴 일이었는데 왜 자꾸 떠오르는지. 좌석도 없이 곤란했을 엄마, 가끔 있는 일이었는지 엄마가 다음 기차로 다시 돌아올 수 있도록 친절하게 안내해 준 승무원. 외할머니는 무슨 표정이었을지, 엄마는 그 잠깐 사이에 어디에 서서 기다렸을지. 노년의 모친을 배웅하는 마음은 어땠을지.


엄마를 몰랐었다. 엄마가 얼마나 진심을 숨기지 못하는 사람인지, 얼마나 열심이었는지 잘 몰랐다. 너무 알아달라 하니까 괜한 심술이 들어 더 알아주기 싫었던 것 같다. 어린애들이 무섭단 건 엄마를 무시하는 아빠를 보며 같이 엄마를 무시하는 점일 것이다. 잘못인지 모르니까. 마음을 인지하지 못하고, 고칠 줄 모르니까. 못된 마음을 배우는 건 쉽고, 알아채고 고치는 일은 어려우니까.


엄마 품에서 나와 혼자 세상을 마주하는 일은 너무 무섭고 아팠다. 한참 동안 엄마 탓을 했다. 어쩔 수 없는 거라지만, 나에게 세상은 이런 곳이라고 살아남는 법이라도 좀 알려주고 내보내지. 다른 부모들은 그러지 않나. 사회생활 잘하는 법을 집집마다 전수하지 않나. 왜 나에게 아무것도 알려주지 않아서 나를 고생시키는지.


원망과 눈물로 물든 시간이 한참 지나고 조금씩 생각이 바뀌었다. 세상은 원래 이랬고, 엄마 품이 따뜻했던 거라는 걸. 어쩌면 엄마는 이미 엄마가 아는 모든 걸 물려주었을지도 모른다. 엄마는 여전히 정이 많고, 진심을 숨기는 게 서툴고, 열심히 하지 않는 법을 모른다. 나는 정이 많고, 진심을 숨기는 게 서툴고, 열심히 하지 않는 법을 몰라 고생깨나 했지만, 그 시간이 나를 나 아닌 것으로 만드는 게 아니라 나와 나 닮은 엄마를 이해하고 사랑하게 만들어준 것에 감사한다.


외할머니에겐 원망할 엄마조차 없었다. 너무 일찍 혼자가 된 할머니는 나보다 더 어릴 때부터 차가운 세상에서 살아남아야 했다. 원망을 들어줄 사람도 없었을 테고, 누굴 원망하면 마음이 무너질까 봐 이를 악물고 견뎠을 것이다. 할머니는 결혼해서 오남매를 낳았고, 철없는 어느 딸의 원망을 들으며, 미간이 아닌 볼에 주름이 잡힌 둥글둥글한 노인이 됐다. 나는 그를 진심으로 존경한다. 종종 뚱뚱한 여자를 질타하고, 본인 돌아가시기 전에 결혼하는 모습을 보여달라 하시지만, 그가 살아온 삶을 이해할수록 그 말이 괴롭지 않다. 스스로에게 한없이 엄격했을 삶. 여전히 머리 다 큰 딸들에게 돈을 주고, 이웃들에게 직접 만든 반찬을 나눠주고, 성당에 나가 봉사를 하는 90을 앞둔 노인.


할머니는 나이가 들수록 자꾸 나와 우리 엄마를 찾는다. 제일 많이 웃고, 많이 울고, 원망 많았던 우리 둘은 이상하게 시간이 갈수록 인기가 많다. 가진 게 많은 자식을 아끼는 노인은 하수다. 없는 주머니를 털어서라도 자꾸 주려는 자식을 예뻐하는 것이 노인의 지혜다. 생활력 부족하고 착한 바보들. 외로운 노인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철없이 품에 안기고 달라붙는 정 많은 사람들.


나도 노인이 된 우리 엄마가 나 보러 왔다가 기차를 타면, 적당히 굴지 못 하고 엄마 짐을 번쩍 들고 기차에 같이 오를 것이다. 들어가, 한 마디 하고 내리는 일을 미루고 이것저것 알려주고 챙겨주다 내릴 때를 놓치고 다음 역에 갈 것이다. 좌석 없이 헤매는 나를 발견한 승무원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엄마 옆에 어색하게 서서, 민망함을 감추려 농담을 할 것이다. 아마 엄마도 그랬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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