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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두루미 Jan 05. 2023

에스프레소 머신이 갖고 싶다.

미니멀라이프를 하면서 에스프레소 머신을 사도 되는가?

이 글은 에스프레소 머신을 살지 말지 고민하며, 생각을 정리하기 위해서 쓰는 글. 결국 사야 한다는 명분을 만들기 위한 글이 될 것 같지만, 일단 써본다.


1. 내가 가지고 있는 커피 관련 도구들

언제부터였을까. 에스프레소 머신이 갖고 싶었던 것은? 대충 떠올려봐도 1년은 넘었다.


우선, 나는 네스프레소 머신(시티즌)이 있다. 2011년 프랑스에 갔을 때, 사촌언니가 가지고 있는 머신이 좋아 보여서 (충동적으로, 홀려서) 굳이 필요하지 않은데 따라 산 것. 그럼에도 불구하고 귀국하는 날 기내캐리어에 커피머신을 챙겨 왔고, 부모님 집, 인천, 서울, 철원까지 옮겨 다녔다.


결혼하면 으레 커피머신을 사거나 선물 받는데, 나는 이미 있었기 때문에 굳이 사지 않았다. 그때 처음으로 에스프레소 머신이 갖고 싶긴 했던 것 같다. 한창 씀씀이가 커져있을 시기기도 했고, 무엇보다 있어 보이니까 손님 오면 자랑하기 좋을 것 같아서.

하지만, 당시 남편과 나는 주말부부였고, 회사에서 커피를 매일 내려마시거나 사 마시기 때문에 집에서까지 커피를 필요는 없었다. 그리고 우리 집 앞에 스타벅스를 비롯한 커피체인점이 최소 20여 개는 있었기 때문에, 주말에도 커피를 사 마셨다. 또 주방이 좁은 편이어서 밖에 내놓지 않고, 손님이 왔을 때만 연결해서 사용했다.


그러다가 코로나가 터졌다. 재택근무를 시작하면서 회사에서 매일 마시던 커피를 더 이상 마실 수 없게 됐다. 하루종일 집에서 일하는 것은 나도 처음이었기에 너무 지겨웠고, 재택근무가 길어지면서 가장 먼저 커피머신을 꺼냈던 것 같다 캡슐도 대량으로 주문했다. 그렇게 집에서 매일 (최소) 커피 한잔을 마시는 삶이 시작되었다.


정말 오랜만에 찬장에서 커피머신을 꺼낸 날, 소리만 나고 커피가 나오지 않았다. 사실 그때 나는 조금 설렜던 것 같다. 새로운 머신을 살 수 있는 명분이 생긴 것 같아서. 일리 캡슐머신이 더 맛있다고 하기도 했고, 버츄오도 좋아 보여서 어떤 걸 행복한 고민을 했다. 그때도 에스프레소 머신을 찾아보긴 했지만, 다음날 언제 그랬냐는 듯이 내 오래된 커피머신은 다시 정상적으로 작동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지금까지도 멀쩡하다. 어떻게 이렇게 멀쩡하지 싶을 정도로 멀쩡하다.


2020년 2월부터 시작했던 재택근무를 (운이 좋게도) 아직 하고 있다. 만 3년 동안 캡슐커피를 마셨으니 캡슐커피가 질린 것은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겠다. 캡슐 커피의 한계가 느껴졌고, 집에서도 더 맛있는 커피가 마시고 싶어졌다.


우리 집엔 프랑스에서 사 온 보덤 프렌치프레스가 있다. 캠핑 갈 때는 항상 프렌치프레스를 챙겨간다. 하지만, 집에서 매일 프렌치프레스로 커피를 내려마시기엔 원두 찌꺼기 관리가 너무나도 귀찮다. 대체제가 필요하다. (여기서부터 난 미니멀라이프에 실패했다.)


당시 내가 즐겨보던 유튜버들은 하나같이 커피를 드립으로 내려마셨다. 그리고, 그때 남편의 직장상사는 매일 아침 회의 때 커피를 내려줬는데 남편은 그게 참 멋있다고 했다. 그리고 핸드드립을 시도해보라고 권유했다. 그때부터였나, 핸드드립이 하고 싶었던 것은?

하지만 핸드드립을 하기 위해서는 이런저런 도구가 꽤 많이 필요했다. 드리퍼, 서버, 필터, 주전자, 저울. 이 모든 걸 사는 게 크게 달갑지 않아서 6개월도 넘게 고민을 했던 것 같다. 그리고 작년 1월 이사 오고 나서 큰 마음먹고 이 모든 도구를 준비했다. 그리고 너무 슬프게도 드립커피는 내 취향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원두가 문제인가 해서 원두를 바꿔보기도 하고, 추출법을 바꿔보기도 했지만 난 그냥 에스프레소 머신으로 내려진 커피를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그렇다. 이 모든 커피 관련 도구를 경험하한 후 나는 에스프레소 머신이 갖고 싶었다. 작년 생일선물로 에스프레소 머신을 받으려고 하다가 가격이 너무 비싸서 내려놓은 후 일 년이 지났고, 여전히 갖고 싶다. 이것은 불치병이다. 아이패드병처럼 가져야만 끝나는 그런 병.


2. 커피에 대한 나의 취향

나는 커피를 좋아한다고 생각하고 살았다. 카페에 가면 거의 아메리카노만 마시고, 집에서도 일주일에 4일 이상은 하루 한잔 커피를 마신다. 해외여행 가서도 커피는 하루 한잔 꼭 마신다. 보라카이에 갔을 때 내 입에 맞는 카페가 없어서 너무 괴로웠을 정도. 그런데 커피를 내가 왜 좋아하는지를 스스로에게 물어봤을 때,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각성효과 때문이라고 하기에는 부족하다. 물론 대학생 때 보다야 커피를 마시면 두근거리긴 하지만 (대학생 때는 커피 마시면서도 잤다), 커피를 마시면 몸에 카페인이 들어가서 머리가 잘 돌아가고 활력이 생기는 건 잘 모르겠다. 그리고 그렇게까지 카페인 충전을 해서 해야 할 일도 없다. 오히려 늦게 마시면 숙면에 방해가 되는 느낌만 든다.

커피의 맛을 즐긴다고 하기에는 부족한 것 같다. 카페에서 아메리카노를 시켰을 때 내가 좋아하는 원두취향인지 아닌 지정도는 구분할 수 있지만, 딱 여기까지인 것 같다.


그렇다. 습관 때문이다.

우선, 물 대신 음료를 마시고 싶을 때, 마땅한 대체제가 없다. 나는 차를 좋아하지 않는다. 그리고 작두콩차, 우엉차, 보리차 등등은 아침에 한잔 따뜻하게 마시기에는 좋지만, 점심이나 저녁을 먹은 후에 마시기엔 부족하다. 밥 먹고 물 먹는 느낌이랄까.

카페에 가서도 마찬가지이다. 난 단 음료를 좋아하지 않는다. 그래서 에이드류나 주스류는 마시고 싶지 않다 보니 항상 아메리카노를 마시는 것 같다.


임신초기 12주까지는 커피를 아예 마시지 않았다. 그때까지 아이의 중요한 장기가 생긴다고도 했고, 술, 카페인을 동시에 끊어보고 싶기도 했기 때문이다. 의외로 커피를 세 달 동안 안 마셔도 큰일이 일어나지 않았다. 오히려 커피가 마시고 싶다는 생각 자체가 들지 않아서 스스로도 놀라웠다. 물론, 카페 가서는 마실 음료가 없어서 곤란했지만, 그러다 보니 카페를 잘 안 가게 되어서 오히려 돈도 아낄 수 있었다.

16주 이후 입덧이 끝나고 슬슬 디카페인 커피 또는 밖에서 일반커피(철원에는 디카페인 커피를 파는 곳이 없다)를 하루 한잔씩은 사 마시기 시작했다. 그리고 다시 습관처럼 하루 한잔 커피 마시는 삶으로 돌아왔다. 이래서 카페인 중독이 무서운 건가?


3. 갖고 싶지 않은 이유

작년에 내 목표 중 하나는 빈속에 커피 마시지 않기였다. 주변 친척분께서 위암수술을 하셨는데, 출근해서 빈속에 매일 커피 한잔을 마셨던 게 원인인 것 같다고 말씀하시는 것을 들었기 때문이었다. 커피를 끊는다는 것은 꽤나 큰 결심이 필요한 일었기 때문에, 끊지는 못하고 최소한 빈속에 마시지 않기로 하고 점심을 먹은 이후에 마셔왔다.

커피가 위, 치아에 안 좋다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이다. 철분, 비타민 흡수를 방해한다고도 한다. 커피를 하루 한잔 마시는 게 정말 좋은 습관일까? 술도 예전엔 하루에 한잔 마시는 것은 건강에 좋다고 했던 때가 있었다. 지금은 세계보건기구에서 정한 1급 발암물질이다. (갑자기 앞으로 가공육을 최대한 먹지 말아야지! 하는 결심도 함께한다.) 커피는 발암물질에서는 제외되었지만, 그렇다고 몸에 좋은 음식은 아닌 게 분명하다. 에스프레소 머신을 살게아니라, 그냥 내 습관을 바꿔야 하는 게 아닐지.


그리고 난 주방에 물건을 늘어놓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데, 우리 집에는 소형가전이 너무 많다. 지금 사용 중인 커피머신은 크기가 상대적으로 작기 때문에 싱크대 하부장에 숨겨두었지만, 에스프레소머신은 어쩔 수 없이 싱크대 위로 올라와야 한다. 향후에 젖병소독기, 아기포트 등을 주방에 둬야 한다고 생각하면 사지 않는 게 맞는 것 같다.


4. 갖고 싶은 이유

내가 좋아하는 것은 커피를 마시는 행위 또는 커피의 맛 자체보다, 커피를 마시는 시간인지도 모른다. 나를 위한 보상 같은 느낌이랄까. 아이를 낳고 일 년간은 일주일에 이틀을 제외하고는 아이와 나 혼자 집에 있어야 한다. 그래서 나만의 시간을 즐길 방법이 뭔지 생각해봤을 때 '나를 위한 작은 사치'느낌으로 커피를 내려마시고 싶은 게 아닌지. (물론 아기가 깰 수 있으니 잠들기 전에 샷으로 내려두고, 아이가 잘 때 아이스아메리카노로 마셔야 할 듯)


일 년 동안 갖고 싶었던 물건이면, 사서 후회할 것 같지는 않다. 드립커피처럼 에스프레소커피가 입맛에 안 맞진 않을 테니깐. 브레빌머신도 고장이 안 나기로 유명하다고 하고, 어차피 가질 물건이면 빨리 사서 오래 쓰는 것이 더 좋지 않을지.


갖고 싶은 이유와 갖고 싶지 않은 이유는 모두 타당하지만, 갖고 싶은 이유를 마지막에 쓴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커피머신을 사겠다는 나의 의지다. 그렇다. 역시 사야 끝나는 것일까? 오늘 밤엔 커피와 건강의 관계에 대한 책을 조금 더 찾아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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