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의 다짐
2018년이 끝날 무렵, 나는 우연히 들른 호떡집에서 뜨끈뜨끈한 호떡 3개를 사서 집에 오는 길에 2019년의 다짐을 하나 했었다. 그건 바로 ‘미워하지 않겠다’는 것. 한 해 동안 몇몇 사람을 지독히도 미워한 끝에 돌아온 건 결국 자기혐오였으므로 미움받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되 미워하는 것을 두려워하는 한 해를 보내고 싶었다. 혼자 마음먹고 만 다짐이었는데도 불구하고 꽤 큰 힘을 가지고 있어서 누군가 미워지려고 할 때마다 2018년 호떡을 먹고 있는 내가 불쑥 튀어나와서 ‘야! 그때 너 약속했었잖아!’하고 외쳤다. 물론 호떡 먹는 나도 입 다물고 있게 할 만큼 고약한 인간이 있긴 했지만 대체로 그 다짐을 잘 지켰다. 그래서 2019년이 끝나갈 무렵, 더 나은 한해를 만들어줄 단 하나의 다짐을 떠올려봤다. 올해의 다짐은 있어 보이는 척하지 말기다.
나는 화장을 즐겨하지 않는 편이다. 특별한 신념이 있다기보다 귀찮다. 화장을 하는 것도 귀찮지만 지우는 것도 귀찮다. 화장을 할 때마다 녹초가 된 몸으로 집에 돌아와 30분 정도 씻기 귀찮아서 몸부림치는 나와 피부에 적당한 온도를 맞추기 위해 물 조절에 심혈을 기울이는 나, 눈가의 쉐도우와 아이라인을 깨끗이 지우기 위해 허연 거품을 얼굴에 묻힌 채 거울을 뚫어지게 보는 나를 떠올린다. 벌써 귀찮아 죽겠다. 그리고 어쩐지 화장을 한 내 모습은 진짜 나 같지가 않다. 어쩌다 화장을 하고 간 날, 사람들에게 오늘 예뻐요! 어디 가세요?라는 말을 들을 때마다 어깨가 1cm 정도 으쓱할 만큼 기분이 좋기도 하면서 그 말을 들은 사람이 진짜 내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화장을 한 나도 내가 가진 여러 모습 중 하나겠지만 민낯의 나보다 더 나일 순 없다는 찝찝함이 있다.
나지만 진짜 나 같지 않은 내가 한 명 더 있다. 바로 인스타그램에서 보이는 나다. 그곳에서 나는 일을 열심히 하고, 책과 영화를 좋아하고, 글을 자주 쓰고, 인사이트 얻기를 즐기며 좋은 사람들에 둘러싸여 종종 해외여행을 떠나는 사람이다. 이런 내가 거짓은 아니지만 중요한 건 진실도 아닌 것이다. 나는 일을 열심히 하긴 하지만 서툰 부분이 많고, 책이나 영화를 많이 보려고 노력만 하고, 글을 자주 쓰긴 하지만 끝맺음 못한 글이 훨씬 많고, 인사이트 얻기를 즐기면서도 이에 부담을 느끼며, 주변의 좋은 사람들에 비해 나는 한없이 모자라다. 실재하는 나는 네모난 박스 안의 나보다 훨씬 어쭙잖은 것이다. 재미없고, 뻔하고, 공허하고, 슬프다. 내 인생의 편집권은 내게 있지만 이 네모난 박스에 갇히는 순간 그 편집권의 주인은 모호해진다. 이 박스를 채우는 사람의 것인지, 그 박스에 열광하는 사람의 것인지.
이렇게 과장되고 포장된 개인의 공간에 타인을 초대하는 것. 2019년에는 이것의 영향력에 대해 생각해보게 된 일련의 사건들이 일어났다. 화려해 보이기만 했던 연예인, 탑 아이돌의 삶. 그 이면에는 누구나 그렇듯 깊은 괴리감과 어두운 외로움이 가득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알 리 없는, 아니 알려하지 않은 사람들의 혀끝은 sns 너머에 있는 인간의 존엄성을 무참히 짓밟았고 그렇게 그들의 생명력은 빛을 잃어갔다.
<아픔이 길이 되려면>이란 책에서 김승섭 교수는 ‘물고기 비늘에 바다가 스미는 것처럼 인간의 몸에는 자신이 살아가는 사회의 시간이 새겨집니다’라고 말한다. ‘공동체와 완전히 분리되어 독자적으로 살아가는 개인은 존재할 수 없기에, 사회적 환경과 완전히 단절되어 진행되는 병이란 존재할 수 없습니다’라고도 말한다. 즉 우리가 무심히 개인의 일탈, 잘못, 실수라고 치부했던 일이 사실은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사회적 문화적 환경으로 인해 일어날 가능성이 훨씬 높은 것이다. 2019년 우리가 두 소녀 잃은 이유는 그들의 정신력이 약했거나, 그들이 처한 상황이 특수했기 때문이 아닐 것이다. 평범한 개인의 우상화로 인한 박탈감은 질투와 증오, 불안을 낳는다. 이 악한 감정의 사회적 대가가 어떻게 나타날지는 너무나 명백하다.
내일이 올 걸 아는데 난 핸드폰을 놓지 못해. 잠은 올 생각이 없대. 다시 인스타그램 하네. 잘난 사람 많고 많지. 누군 어디를 놀러 갔다지. 좋아요는 안 눌렀어. 나만 이런 것 같아서. 저기 인스타그램 속엔 문제야 문제. 이놈의 정보화 시대 단단히 잘못됐어. 요즘은 아는 게 더 괴로운 것 같은데 가면 갈수록 너무 어려워 나만 이런 건지.
DEAN, instagram
초연결의 심볼처럼 여겨졌던 sns가 정말 우리를 연결시키고 있는 걸까? 어쩌면 숨기고 싶은 나와 드러내고 싶은 나 사이의 단절, sns 속 다른 사람의 삶을 동경하는 나와 불안해하는 나 사이의 단절, 거짓을 진실처럼 믿는 나와 진실을 알려하는 나 사이의 단절을 만들어내는 건 아닐까? 너무 바쁘기도 하고 sns에 한창 환멸을 느꼈던 때, 인스타그램을 잠시 끊은 적이 있었다. 그 시기에 신기한 것을 하나 발견했는데 그건 내가 소비의 욕구를 전혀 느끼지 못했다는 거다. 옷이나 신발, 가방은 물론이고 책이나 여행까지. 소비 욕구가 정말 반토막이 났다. 조금 무섭기까지 했다. 그동안 내가 사고 싶어 했던 건 정말 내가 사고 싶어 했던 것이었을까, 내 불안이 사고 싶어 했던 것이었을까.
팔로워 400명, 그중에서도 이름도 성도 모르는 외국인 팔로워가 가득할 나 따위가 걱정할 일은 아니지만 혹시나 아주 잠깐이라도 있어 보이는 척 포장된 내 sns 속 모습 때문에 박탈감이나 불안감을 느낀 사람은 없었을지 걱정스러웠다. 그래서 올해의 다짐은 있어 보이는 척하지 않기다. 좀 어려운 부분은 있다. 어디까지가 있어보는 척하는 것이고, 진짜 있는 것인지의 기준이 모호하다. 그건 나도 모른다. 스스로 찾아봐야지. 정리하고 나니 어쩐지 미워하지 않기만 하면 되었던 2019년의 다짐보다 더 고차원적인 다짐이 되었다. 이 다짐으로 인해 2020년의 끝에 나는 어떻게 변해있을지 궁금하다. 한번 잘해보자 도어오프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