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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연이 Sep 18. 2018

2000년 9월 14일의 역사

이런 편지를 쓸 일이 없길 바라며 쓰는 편지



당신, 기억합니까? 우리 처음 만난 그 날을. 나는 그 모습이 이 날 이때까지도 눈 앞에 선합니다. 까만 피부에 진한 눈썹. 도시에서 전학온 지 얼마 안된 나는 투박한 당신의 모습과 무표정한 얼굴에 괜시리 겁이나 말 한 마디 못 붙이고 쭈뼛거렸던 기억이 납니다. 학교모퉁이에서 혼자 불을 가지고 놀던 내게 소리 없이 다가온 건 기억이 납니까? 신기한 것을 보여주겠다고 이상한 장난을 치다 학교를 홀랑 태워먹을 뻔 했지요 우리. 허둥지둥 불을 끄고는 서로를 바라보며 멋쩍게 웃지 않았습니까.


그때 나는 당신의 입꼬리가 이렇게 예쁘게 올라가기도 하는 구나 하고 생각했습니다. 나는 그 때부터였습니다. 당신이 나를 보며 웃어주던 그때. 아마 당신도 내가 그런 당신을 보고 웃는 것이 좋았겠지요. 그래서 어느 날, 우리 집 뒷마당으로 찾아와 어울리지 않게 손을 떨며 나를 좋아한다고 말해주었겠지요. 그 날 당신은 겨울이면 우리 동네에 빠알갛게 피어오르는 동백꽃 색깔의 자켓을 입고 있었습니다.

그때야 진정 알았습니다. 나하고 가까이 살던 남자 동무와 집으로 올라가는 계단을 함께 걷고 있으면 분명 아까 갈림길에서 헤어진 당신이 계단 옆 골목으로 훅 하고 튀어나와 우리를 놀래키던 것이 나를 좋아했기 때문이라는 것을요. 남자 동무와 단 둘이 집에 올라가는 시간조차 질투가 나 지름길 골목을 그렇게 내달려 우리의 귀가를 방해한 것을요. 그 남자 동무가 그걸 보고선 지나가는 말로 그러대요. “쟤가 너 좋아하는 가보다.” 나는 그럴리 없다 생각했다가도 괜히 기분이 좋아져 마음이 흐뭇했었습니다.

당신의 고백 덕분에 우리는 다른 모습의 친구가 되었습니다. 어딘가 사납기도 하고, 무심하다고만 생각했던 당신이 다정하게 내 이름을 불러주는 것이 어찌나 설레든지. 나는 깜깜한 밤에도 당신 생각에 머리가 하얘져 잠을 이루지 못한 날도 있었습니다.

말도 없이 억수 같이 내리는 비를 못 피하고서 감기에 걸려 몇날 며칠을 누워있던 날, 독감의 기세가 어찌나 무섭던지 우리 어머니도 옮을까 내 방에 얼씬하지 않을 때 당신이 와주었지요. 나는 그 날 내가 너무 아파 헛것이 보이나 했습니다. 내가 아픈 것이 보기 싫다면서 당신을 닮은 투박한 말을 내갵고선 나보다 더 아픈 표정을 하고서 아직 초가을이라 선선하기만 한데도 두꺼운 솜이불을 꺼내 덮고도 벌벌 떠는 내 곁에 머물러주었습니다. 이 날이 당신께도 퍽 인상 깊은 날이었는지는 당신 글, 소나기를 보고서야 알았습니다.

처음에는 이토록 좋아하게 될 줄 몰랐습니다. 당신도 나를 이토록 좋아해줄 줄은 더욱 몰랐습니다. 시험을 망치고 속상해하는 내게 단 것을 건네주면 기분이 풀릴 것을 알고서 저만치 뛰어나가 풍산개만큼 복스러운 솜사탕을 사다 주신 것을 기억합니까? 나는 그날 솜사탕보다 솜사탕을 사러 다급히 뛰어가는 당신의 뒷모습이 달아서 다시 한 번 반했습니다. 그 모습이 꼭 나를 사랑한다는 고백처럼 들려 돌아오는 당신 손에 쓰디쓴 칡이 들려있었던들 나는 달게 받아 먹었지 싶습니다.  

우리는 바다로 둘러쌓인 그 시골 섬에서 여름이면 바닷 속을 헤엄치고, 겨울이면 눈밭을 뒹굴며 눈으로는 서로를 바라보고, 손으로는 서로의 손을 맞잡고 있었습니다. 겨울이 되면 얼음장보다 더 차가워진 내 손을 꼭 잡아주며, 손이 찬 사람은 마음이 따뜻하다고. 당신은 손이 따뜻한 대신 마음이 차가우니 당신은 내 손을 잡아주고 나는 당신의 마음을 어루만져주면 되겠다 말하던 날도 기억납니다.

내가 다시 도시로 가게 되었을 때 이제 겨울에 손을 잡아 주지 못하니 이거라도 꼭 끼고 다니라며, 둔한 손 끝으로 직접 뜨개질해 만든 나무색 벙어리 장갑을 쥐어 주셨지요. 나는 그 장갑만 보면 눈물이 가득 맺힌 채로 웃으며 나를 보내주려고 억지로 울음을 참던 당신의 모습이 떠올라 울컥합니다.

이제는 시간이 흘러 당신의 손이 찹니다. 우리가 헤어진 동안에도 나는 당신이 짜준 장갑 덕에, 우리 어린 시절이 고스란히 묻어있던 당신의 글 덕에 한 번도 춥지 않았습니다. 떨어져있어도 당신의 그 마음이 어찌나 빽빽히 느껴지던지 혼자여도 외로움을 느낄 틈이 없었습니다.

순원씨, 우리 눈가 주름이 우리가 헤엄치던 동해 바다만큼 깊고, 우리 머리칼이 우리가 뒹굴던 눈밭만큼 새하얘졌습니다. 차가워진 당신 손을 잡고 있으니 이제야 시간이 이만큼 흘렀구나 싶습니다. 이제는 내가 당신 가는 길 배웅합니다. 당신은 살만큼 살다가니 다음 생애 미련이 없을지라해도 나는 다음 생애 당신을 한 번 더 만나고 싶습니다. 그때엔 내가 당신을 쫒아 놀래켜주기도 하고, 풍산개만큼 새하얀 솜사탕을 안겨드리기도 하겠습니다. 장갑은 선물할 일이 없게 늘 손을 맞잡고 곁에 머물며 살면 좋겠습니다. 늘 나한테 해주었던 말, 다치지 말고 조심조심 가세요. 도착하면 꼭 알려주세요. 이제 편지는 못할테니 나는 꿈에서 기다리겠습니다.

당신의 친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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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 9월 14일은 <소나기> 로 유명한 소설가 황순원이 명을 달리한 날이라고 한다. 이 날 글쓰기 모임의 과제는 ‘오늘의 역사’ 에서 마음에 드는 역사를 골라 마음껏 글을 쓰는 날이었다. 황순원 이란 이름을 보자 소나기가 떠올랐고, 소나기를 떠올리자 얼마 전 다시 본 클래식이 떠올랐다. 소나기 속 소녀가 되어서, 클래식 속 주희가 되어서 써본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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