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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연이 Apr 08. 2020

레이디버드

당연하게 주어진 것들의 당연하지 않음.


엄마와 고향은 내게 당연하게 주어졌다. 노력할 필요도, 찾아 헤맬 필요도 없이 처음부터 쥐고 있었던 것들이었다. 그리하여 내가 쥔 것들을 자각하기 시작한 10대 때, 난 그들의 소중함을 알지 못했다. 알기는커녕 화를 냈다. 왜 나를 더 사랑해주지 않냐고, 나를 이렇게 힘들게만 하냐고.


크리스틴이라는 본명 대신 자신을 ‘레이디버드’라고 불러주길 바라는 이 소녀는 어딜 가든 자신이 주인공이어야만 직성이 풀리는 친구다. 차마 예명까지 쓰진 못했지만 주목받지 못하면 심통이 났고, 늘 이 구역의 최고가 되고 싶었던 내 과거와 별반 달라 보이지 않았기에 초반부터 이 영화가 흥미롭게 느껴졌다. 하나뿐인 오빠와 틈만 나면 싸우는 것 역시 어릴 때는 서로 죽이지 못해 안달 냈던 나와 남동생의 모습과 오버랩되었고, 항상 다정한 아빠와 친한 만큼 매섭게 서로를 할퀴어대는 엄마와의 관계 역시 비슷했다. 지구 반대편, 그것도 찬송가에서나 들어볼 법한 특이한 지명을 가진 시골 동네의 소녀와 나의 성장 스토리가 여러 면에서 닮았다니, 지나친 새벽 감성에 젖은 게 아닐까 싶어 정신을 차려보려다가도 중2병은 만국 공통의 청소년이 앓는 지병이라 대체로 동질감에 휩싸일 수밖에 없었다.




- 엄마가 날 좋아해 주면 좋겠어

- 널 사랑하는 거 알잖아

- 근데 날 좋아하냐고?


프롬에 입고 갈 옷을 입어보는 이 장면이 유독 먹먹했다. 내 마음을 몰라주는 엄마가 어쩔 수 없이 나를 책임지고, 사랑하고는 있지만 내 존재를 기뻐하고 좋아하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내가 없었다면 엄마는 더 행복했을지도 몰랐을 테고, 엄마도 그걸 바랐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한없이 추락하는 듯한 슬픔을 느꼈다. 지금이야 그때 내가 참 어렸구나 싶지만 사랑 말고 날 좋아하냐고 묻는 크리스틴의 마음이 어떤 종류의 것인지 와 닿아서 덩달아 슬퍼졌다. 동시에 그때 내가 느낀 감정이 나만 느끼는 것이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에 이상한 안도감이 들기도 했다.


영화를 보는 내내 과거의 내가 떠올라서 몽실몽실하면서도 울지는 않았는데 크리스틴이 뉴욕으로 떠나는 장면에서 터져버렸다. 쌀쌀맞게 딸을 내려준 후 이내 후회하고 출국장으로 돌아가는 엄마의 다급한 얼굴, 기숙사에 도착해 엄마가 쓰다가 이내 구겨버린 편지들을 받고 아빠와 통화하는 크리스틴의 복잡한 얼굴이 나의 스무 살을 떠올리게 했다. 엄마와 완전히 떨어져 살게 된 그날, 배를 오르는 나를 끝까지 배웅해주기 위해 철조망 뒤에 서있던 엄마의 그 복잡한 얼굴이 오랜만에 생각났다. 고3이라 예민하다는 이유로 별 것 아닌 것에도 온갖 짜증을 부리고 별 해괴한 짓을 하던 딸을 떠나보내는 엄마의 마음은 어땠을까.




- 안녕 엄마, 엄마도 새크라멘토 거리를 처음 운전할 때 감상에 젖었었어? 평생 지나다니던 그 길들, 가게랑 건물들이 너무나 정겨웠어.


운전면허 시험에 합격한 크리스틴은 직접 차를 운전하며 늘 떠나길 고대했던 고향 새크라멘토를 둘러본다. 같은 길, 같은 건물, 같은 노을인데 이별을 앞두고 있어서일까 정겨우면서도 어쩐지 생경하다. 노을빛을 가로지르며 익숙한 동네를 둘러보는 딸과 엄마의 얼굴이 겹친다. 별 수 없이 엄마의 고향이자 나의 고향과도 다름없는 섬이 떠오른다. 수많은 이별과 사랑과 파도소리와 눈의 촉감을 알려주었던 그 섬을 10대의 나는 너무나도 벗어나고 싶어 했다. 그토록 좁고 폐쇄적이기만 했던 고향은 벗어나서야 안온하고 다정하게 다가왔다.





어쩌면 우리의 10대는 마음껏 잃어보아야 하는 시기일지도 모른다. 노을처럼 늘 따뜻하게 나를 품어줄 고향과 가족, 조금 과한 핫핑크 드레스처럼 유치한 취향마저 이해해줄 친구, 내게 당연하게 주어진 듯한 소중한 것을 잃어보아야만 그 진정한 가치를 깨닫게 된다. 몰라도 어려서 용서가 되고, 서툴러도 처음이기에 괜찮은 유일한 시기. 그때의 ‘레이디 버드’가 있었기에 당연하게 주어진 것들의 당연하지 않음을 알게 된 지금의 내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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