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꾸만 뭐 때문에 일하냐고 묻는 현타에게
2020년의 1분기는 여럿과 싸웠다. 우리 팀의 OKR과 싸웠고 잊을만하면 문을 두드리는 현타와 싸웠다. 현타는 “왜 일해? 뭐 때문에 일해? 뭐를 위해서 일하는지도 모르면서 왜 계속 일해?”하고 물으며 약 올렸다. 약은 바짝 오르는데 정작 그 물음에 제대로 답을 내리지 못해 괴로웠다. 예전에 쓴 글을 보았다. 신입 때 회사에 들어간 이유를 써둔 출사표 같은 글이었다. 흔들릴 때마다 이 글을 보며 초심을 떠올렸는데 오랜만에 꺼내어보니 참 어리고 무모했던 내가 그곳에 있었다. 그 순진함이 조금 조악해 보여서 오래 들여다볼 수가 없었다. 지금의 나는 무엇을 위해 일하는 걸까.
현실감각이 좀 떨어지던, 그러니까 엄마가 떨어트려주는 콩고물을 염치조차 생각지 못하고 받아먹을 수 있었던 젊은 시절. 나는 돈이 인생의 전부가 아니라고 굳게 믿었다. 돈이 좀 없어도 충분히 행복할 수 있다고, 돈을 밝히는 건 너무나 어리석고 속물 같은 거라고 생각했다. 부모의 지원이 있었기에 할 수 있는 철없고 배부른 소리였다.
어쩌면 엄마가 늘 입버릇처럼 얘기하던 말에 반항하고 싶어서 일부러 그렇게 믿었는지도 모르겠다. 엄마는 항상 사람이 통장에 돈이 있어야 당당할 수 있다고 말했다. 거지 같은 옷이 있어도 다 떨어진 신발을 신고 있어도 통장에 돈이 있으면 고개 빳빳이 들고 걸을 수 있다고 했다. 그게 돈의 힘이라고. 그럴 때마다 나는 진짜 당당한 사람은 가진 게 없어도 당당하고 떳떳할 수 있다고 모범생처럼 되받아쳤다. 쥐뿔도 모르면서 말이다.
월급이 조금 올라서 오랜만에 쇼핑을 했다. 가벼운 마음으로 옷을 사는 건 여전히 익숙하지 않아서 장바구니에 넣었다 뺐다 했던 옷 중 가장 마음에 들었던 옷을 골라 주문했다. 어디에나 쉽게 어울릴 듯한 하늘색 니트였다. 뽀얗게 푸른 그 니트를 보니 잊고 있던 기억 하나가 실 뜯어지듯 툭하고 삐져나왔다.
열 살 무렵이었나. 엄마가 웬일로 하늘색의 여리여리한 티셔츠를 내게 주려고 가지고 온 거다. 고운 색의 옷이 예뻐서 신나는 마음에 당장 다음날 걸쳐 입고 학교에 갔다. 자리에 앉아 있는데 친구가 어? 이거 내 옷인데? 하고 말을 걸었다. ‘이거 나한테 작아서 못 입는 거였는데.’ 정확한 말은 기억나지 않지만 그 친구가 내게 건넨 말에선 분명 어떤 악의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랬다면 머리칼을 붙들고 싸우기라도 했을 텐데 자신의 옷을 내가 입고 있는 게 그저 신기하고 반가워서 건넨 듯한 친구의 말에 나는 부끄럽기만 했다. 그 이후로는 그 티셔츠를 입지 않았다. 고개를 빳빳이 들 수가 없었다.
아주 오랜만에 그날의 수치가 떠올랐다. 가난의 민낯이란 그토록 부끄러운 것이었다. 월세를 내고 세금과 통신비와 교통비와 밥값을 제하면 여윳돈이 얼마 되지 않아 늘 마이너스를 걱정하며 살았던, 종종 엄마에게 도움의 손길을 청해야 했던 사회초년생의 내가 다시 떠올랐다. 돈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사람들을 부러워하며 잠들던 내가, 아무것도 모르는 척 금수저를 운운하며 엄마 가슴에 못을 받았던 내가 떠올랐다.
벌이가 나아지니 그간의 걱정과 시샘도 조금은 달아났다. 통장에 돈이 있으니 아프면 바로 병원에 갈 수 있다. 친구나 가족에게 주고 싶은 게 생기면 그냥 선물한다. 필요하지 않아도 갖고 싶으면 산다. 가고 싶은 곳이 있으면 가고, 먹고 싶은 것이 있으면 먹고, 하고 싶은 것이 있으면 한다. 가격표를 보고 고개를 숙이는 경우가 줄어든다. 하나뿐인 가방의 얼룩은 숨기기 급급했지만 여러 가방 중 하나에 난 얼룩은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
사람들이 행복하길 바랐다. 사는 게 조금 힘들지언정 우리 모두 사는 게 녹록지 않으니 서로 이해하고 배려하고 웃어주길 바랐다. 그 마음으로 글을 쓰고 책을 엮었다. 이 마음은 여전히 내가 글을 쓰는 원동력이다. 그러나 글만으로는, 잠깐 예쁘고 아름답고 감동적인 스토리만으로는 지속 가능한 마음의 여유가 생길 리 만무하다.
이제는 안다. 배려는 여유로부터 나오고, 여유는 대부분 물질적이고 경제적인 풍요에서 비롯된다. 어느 정도의 행복은 분명 돈으로 살 수 있다. 그러니 사람들이 행복해지려면, 서로를 이해하고 배려할 수 있게 되려면 일단 먹고 살 만한 세상이 되어야 한다. 내 배가 불러야 주린 배를 잡고 있는 누군가에게 먹을 것을 양보해주고 귀 기울여줄 수 있다. 이토록 단순한 사실을 그동안 고고한 척 잘난 척하느라 바빴던 나는 이제야 제대로 마주한다.
유명하지도 당장 가진 게 많지도 않지만 실력이 있고 열정이 있고 노력하는 자들에게 기회를 줄 수 있는 곳에서 일하고 있다.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일을 충실히 해낸다면 더 많은 사람들이 정당하게 경쟁할 기회를 얻고, 그간의 노력을 인정받고, 새로운 가능성을 만들어낼 수 있다. 이게 바로 여러 사람이 먹고 살 만한 세상을 만드는데 조금이라도 일조할 수 있다는 뜻이 아닐까. 나는 그렇게 믿고 어김없이 무례하게 문을 두드리며 ‘뭐 때문에 일하느냐!’고 소리치는 현타에게 드디어 당당히 말한다. 나는 먹고 살 만해지려고 일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