움직이고 표현하고 감사하라.
3일 만에 바깥공기를 마셨다. 월요일과 화요일에는 집 밖으로 한 발자국도 나가지 않았다. 연일 들려오는 바이러스 소식에 1월부터 이어지는 숫자의 압박. 우울에 짓눌릴 법도 한데 다행히 발랄하다. 좁은 집안을 여기저기 헤집고 다녀 발바닥에 검정 페인트를 바르고 있었다면 방바닥은 캄캄한 밤하늘 같았을 거다. 아주 옛날부터 겪어온 시행착오 끝에 방법을 터득한 듯하다. 우울에 짓눌리지 않는 방법을.
자기 전에 또는 기분이 찌뿌둥할 때는 할까 말까 생각을 이불 개듯 접고 화장실로 간다. 옷을 훌러덩 벗어던지고 샤워기 레버를 온수 방향으로 옮겨 물을 튼다. 우울은 수용성이다. 김이 모락모락 피어나는 따뜻한 물에 몸을 씻기면 우울은 물에 흘러내리고 김과 함께 사라진다. 이렇게 씻고 나오면 개운함과 동시에 성취감까지 든다. 침울에 침몰되지 않았다는 성취감, 스스로 우울을 극복했다는 자랑스러움. 몸에 물기가 마를 때까지 개선장군이라도 된 것 같은 뿌듯함을 누린다.
샤워를 하고 난 후 나는 약간 공의 상태가 된다. 허무한 공이 아니라 그 안을 채워 넣고 싶은 에너지가 끓어오르는 상태의 공. 그럴 때는 청소기를 돌려야 한다. 청소의 사전적 의미는 ‘더럽거나 어지러운 것을 쓸고 닦아서 깨끗하게 함’이다. 기능적으로는 집을 쓸고 닦아 깨끗하게 하는 것이지만 보는 것에 많은 감각을 의존하는 우리 인간은 시각과 의식을 자연스럽게 연결할 수 있다. 읽다 만 책들, 가방에서 들어가지도 나오지도 못하고 있는 자료들, 걸음마다 지렁이같이 꿈틀거리는 머리카락들, 쓰레기통에서 제 발로 걸어 나온 듯한 휴지조각들, 소비문화를 주제로 한 현대미술 전시의 오브제처럼 놔뒹구는 구겨진 영수증 같은 것들이 치워지고 제자리를 찾아가는 모습을 보면 잡다하고 지저분한 감정들도 제자리를 찾아 숨거나 알아서 버려지는 식으로 깨끗이 정리된다.
시간과 체력과 의지가 남아있다면 물걸레질을 해준다. 틀린 글씨를 지우개로 지우듯 방바닥을 빡빡 닦고 나면 샤워를 했던 것과 같은 뿌듯함이 다시 등장한다. 이때 걸레에 미처 치우지 못한 먼지들이 붙어있다면 이 모습을 찍어 인스타그램에 올려 자랑하고 싶은 충동까지 느껴진다. 나는 이렇게 먼지 한 톨도 용납하지 않을 만큼 부지런하고 청결한 사람임을 만천하에 알리고 싶은 것이다. 이 기세를 몰아 마른 걸레질을 한 번 더 해주고 나면 더할 나위 없다. 이 세상에서 가장 생산적인 사람이 된 것 같은 기분에 취한다.
고조된 감정을 그대로 묵혀둬선 안된다. 사람마다 다를 텐데 나의 경우, 좋은 감정이든 싫은 감정이든 제때 올바르게 표출해주어야 좋은 정서를 오랫동안 유지할 수 있다. 감정을 표출하는 방법은 다양하다. 가장 쉬운 방법은 노래를 트는 것이다. 요즘 나의 명랑한 상태를 가장 잘 표현하는 곡은 블루밍이다. 우울을 뜻하는 blue를 이토록 상큼 발랄하게 표현해내는 아이유를 참 좋아한다. 소파에 앉아 또는 침대에 상반신을 반쯤 걸쳐 고개를 까딱까딱거리면서 노래를 따라 부른다. ‘엄지손가락으로 장미꽃을 피워’를 부르는 부분에서는 그 부분이 너무나 생생하게 상상되는 나머지 노래의 뒷부분에서 나오는 ‘백만송이꽃을나랑피워볼래’라는 가사가 미리 떠올라 마치 꽃밭 한가운데에 누워있는 기분이 든다. 그래서 늘 2절이 시작될 때부터 몸을 세우고 마는 것이다.
근심 우와 답답할 울 자를 써서 우울이 된 이 단어의 유의어는 슬픔이기보다 무기력이다. 쓸데없는 근심들이 밀려오자 빠져나갈 곳이 없어 답답하고, 때문에 답이 없는 우울에 갇히면 빠져나갈 힘도 써보지 못하고 축 늘어지기만 한다. 그러므로 우울에서 탈출하는 방법은 말 그대로 탈출하는 것이다. 몸을 써서 빠져나와야 하는 것이다. 몸과 마음은 분명 이어져있다. 샤워를 하고 청소를 하고 좋아하는 노래를 들으며 몸을 들썩이는 식의 다소 소소한 움직임들은 우울로부터 빠져나오게 하는 좋은 탈출구가 된다.
몸과 마음의 연결을 직접 느낀 적이 있다. 내가 의식적으로 요가를 하고, 축구를 하는 이유 역시 이 때문이다. 누군가 피부 밑에서 물총을 쏘는 게 아닐까 싶을 만큼 땀을 한가득 흘린 격정적인 요가를 마친 후 송장 자세라 불리는 사바아사나를 하고 있을 때였다. 발과 손을 편하게 툭 내려놓고 거칠어진 호흡을 자연스럽게 다듬으며 심신을 안정시키는 자세인데 이 순간 가끔 내 안의 ‘기’가 느껴질 때가 있다. 그러니까 나쁜 기운들이 손끝과 발끝을 타고 빠져나가는 듯한 저릿저릿한 느낌. 이 느낌을 느끼면 어떤 카타르시스와 함께 마음이 정화되는 기분을 동시에 느낀다. 몸과 마음이 좋은 기운을 공유하는 것이다.
당장에 몸을 움직이는 것이 힘들다면 마음을 먼저 공략하는 방법도 있다. 행복한 순간을 의식적으로 떠올리는 것. 이 문장을 들을 때마다 가장 먼저 떠오르는 장면은 스무 살 여름방학 때 울릉도 친구들과 선착장의 부둣가에 앉아 치맥을 먹으면서 여름밤을 보냈던 시간이다. 딱히 특별할 것도 없는 이 순간이, 10년 후 이 시간을 소중하게 여기게 될 줄 전혀 몰랐던 그때가 가장 먼저 떠올라 뭉클하고 행복해진다. 다음으로 떠오르는 장면은 대학교 친구들과 함께 수업을 듣고 나서 자취방에 한 데 모여 각각 봉구스주먹밥에 사발면을 해치우고 불투명한 창으로 들어오는 햇빛을 받으며 나른하게 낮잠을 잤던 때다. 눈꺼풀이 채 감기기 직전 따뜻하다고 느꼈던 그 찰나의 감정의 온기가 이토록 오랫동안 생생하게 남을 줄이야
행복한 순간을 떠올렸을 때 이렇게 별 것 없는 기억들이 존재를 드러낼 때마다 삶을 살아가는 데 엄청난 위안이 된다. 앞으로도 살아가는 데 많은 것이 필요하지 않겠구나. 화려한 것, 대단한 것에 욕심내지 않을 수 있겠구나 하는 안도가 든다. 그래서 지금 무기력하게 있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지금 잠깐 무기력하게 있는다고 해서 나 자신을 한심하게 여길 필요가 없어, 이토록 소박한 것에도 행복을 느낄 줄 아는데 지금 당장 내게 무엇이 부족하고 답답해서 미래를 걱정하고 스스로를 미워하는 거야. 괜찮아. 잠깐 이러고 있는다고 세상이 멸망하진 않아. 조금만 누워있다가 씻자.’ 하고 나를 다독이게 된다. 이렇게 내 등을 토닥토닥 두드려주면 그것을 원동력 삼아 앞으로 나아갈 힘을 얻는 거다.
행복한 순간을 떠올리는 것과 비슷하지만 조금 더 장기적으로 삶을 풍요롭게 해주는 방법으로는 감사하기가 있다. 재작년 이맘때 나는 대인기피증에 걸린 게 아닐까 싶을 만큼 불안정한 정서 상태를 갖고 있었다. 제대로 되지 않은 모든 것들이 다 내 탓 같았고, 잘 된 모든 것들이 내 손을 피한 덕분에 일어난 일 같았다. 오랜만에 신경정신과를 찾아 약도 먹었지만 소용이 없었다. 정신적 질환이 아닌 정서적 오류였다. 이 오류를 바로잡기 위해 감사일기를 쓰기 시작했다. 신기하게도 감사일기를 꾸준히 쓰고 난 후부터 하루의 질감이 다르게 느껴졌다. 분명 같은 하루였는데도 말이다. 출근길 버스에서, 퇴근길 지하철에서, 숨이 턱 막힐 때마다 찾은 계단실에서 간신히 감사할 것을 찾아 썼다. 물론 다른 외부 요인의 변화도 있었겠지만 그 변화를 만든 것 역시 감사일기가 아닐까 싶다. 상황이 나아진 후로는 쓰지 않게 되었던 일기를 며칠 전 우연히 꺼내봤다. 너무 웃기고 어이가 없어서 피식하고 실소가 터져 나왔다.
일찍 퇴근해서 필라테스를 할 수 있는 시간이 주어진 것, 친구와 밥을 먹고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좋아하는 프로그램을 나란히 보는 시간이 주어진 것도 감사하다.
칼퇴하고 육회에 어묵에 소주를 마셨는데 어찌 된 영문인지 돌아오는 길이 기억나지 않고 다음날 깨서는 죽여달라 살려달라를 반복했다. 죽지 않고 살아있음에 감사하다...
***할머니네 식당의 김치전을 먹게 해 주셔서 감사하다. 비록 전날의 숙취로 막걸리는 마시지 못했지만 그러니 다음에 한 번 더 가야 할 이유를 만들어주셨음에 감사하다.
마음을 내려놓으니 조금 여유가 생긴다. 집으로 빨리 도망가고 싶지만 일단 주어진 일에는 최선을 다해야겠다는 다짐을 할 만한 체력과 여유가 주어져서 다행이고 감사하다!
오랜만에 봐도 오랜만에 본 것 같지 않은 늘 편한 친구들이 있어 감사했다.
오늘의 근심 걱정 이래 봤자 내일 출근해서 뉴스레터 보낼 걱정, 이따 염색하는데 혼자 잘할 수 있을까 하는 걱정뿐임을.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할 만한 일의 퀄리티는 늘 제각각이었다. 아무리 떠올려봐도 감사할 게 없는 날에는 단지 살아있음에 감사함을 느꼈다. 평소엔 반복적으로 스쳐 지나가는 일상마저도 붙잡아 감사하다고 말했다. 처음에는 오늘은 대체 무엇을 감사해야 하나 싶어서 일기의 분량도 짧고 애써 쓴 티가 여실했다. 애써 감사할 일을 찾고 만드니 습관이 되었고, 작은 일에도 감사를 느끼는 내가 조금 귀엽게 느껴지기도 했다. 억지의 감사가 진심의 감사가 되면서 일기의 양도 불어나고 마음의 여유도 늘어났다. 내 탓을 했던 시간들이 다음에 더 잘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지게 된 것에 감사하는 시간으로 변했다. 쳇바퀴가 도는 것보다도 더 무의미했던 시간들이 아무 일이 없어서 다행인 시간으로 변했다. 마음에 햇살이 비추니 얼어있던 몸과 얼굴 표정들도 녹아내렸다. 우울의 그림자가 드리우면 오늘의 감사했던 일을 떠올린다. 근심이 걷힌다. 스스로 우울을 극복하려고 했던 의지를 가졌음에 감사합니다.
정리하자면 일상을 우울에 짓눌리지 않는 방법은 우울에 나를 가둘 물리적 틈과 정서적 여유를 주지 않는 것이다. 작은 움직임으로라도 발버둥 치는 것. 무기력한 상태까지 다독여줄 행복하고 감사한 순간을 떠올리는 것. 내 걱정의 동선은 장소와 시간의 한계를 늘 초월한다. 울릉도에 있는 엄마에게로 갔다가, 출근한 동생에게로 갔다가, 막막한 내 미래로 갔다가, 운동하고 있을 아빠에게로 갔다가, 곧 여행을 떠날 친구에게 가도 성이 안차면 이 사회나 국가의 명운으로까지 간다. 내게 근심은 마음의 옷이다. 벗고 있는 날보다 입고 있는 날이 더 많다. 그럼에도 짓눌리지 않으려 한다. 무기력하게 있기엔 하고 싶은 게 너무나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