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문연이 Jul 21. 2020

내 기획 피드백하기

어제 : 이 아이디어 대박인데? (메모메모) / 오늘 : ... (삭제)

어느 날 문득 유레카! 하고 좋은 아이디어가 떠오를 때가 있다. 조각조각 흩어져 있던 경험과 인사이트들이 마침내 하나의 퍼즐로 완성되어 거대한 아이디어로 다가오는 순간의 짜릿함은 겪어 본 사람이라면 알 거다. 황금의 땅이라도 발견한 사람처럼 상기된 얼굴을 하고선 속으로 외친다.


'대박사건 대박사건. 내일 회사 가서 얘기해야겠다!!! 와오 미쳤다리 이건 하기만 하면 대박.'


다음날, 출근해서 메모장을 다시 살펴본다. 읭..? 어제 그 빅 아이디어 어디 갔지..? 쓰레기통에 가야 할 메모가 왜 여기 있지..? 에바쌈바 호들갑을 떨면서 떨리는 손으로 꾸역꾸역 입력한 아이디어에서 삐져나오던 광채가 온데간데없다. 아니 분명 어제는 좋았잖아.


그래도 다행인 건 다른 사람에게 말하기 전 스스로 내 기획의 무용함을 알았다는 거다. 정말 무서운 상황은 나조차 이게 괜찮은 아이디어인지 확신도 불신도 없는 상태. 그럴 때 스스로 피드백해보기 위한 기준을 몇 가지 마련했다.  




1. 목적성

기획을 시작할 때는 이유와 목적이 있다. 이때 정신을 제대로 차리지 않고 기획에 살만 덕지덕지 붙여버리면 목적 전치 현상, 그러니까 애초에 기획했던 이유보다 작은 아이디어에 더 매몰되어 목적이 희미해지는 경우가 발생하기도 한다.

길을 잃는 건 한순간이다. 그리고 누구나 그럴 수 있다. 그러니 중간중간 자문해야 한다. 이 기획이, 이 실행 방안이, 이 결과물이 우리가 원하는 기대효과를 만들어낼 수 있을까? 우리가 처음 원했던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는 걸까?

WHY에 대한 깊은 고민 없이 신나게 기획만 하다 보면 촌스럽기 짝이 없는 괴랄한 결과가 나오기 십상이다.  



2. 설득력

뭔가 좋은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그런데 이걸 막 풀어서 설명하려니 너무 어렵다. 그냥 이걸로 밀어붙이고 싶은데 설득을 해야 한다. 대애충 멋있어 보이는 단어들, 누구나 공감할 법한 사회 트렌드를 조합해서 화려한 효과가 감싸는 PPT 또는 양으로 승부하는 서류로 만들어본다. '그래도 아이디어 자체가 좋으니까 대박 나겠지!' 설레는 마음으로 동료에게 소개한다. 동료의 반응이 심상치 않다. '뭐래' 딱 그 표정이다. 

대박 아이디어인데 설득하기가 쉽지 않다? 억지로 끼워 맞춘 느낌이 난다? 그건 그냥 대박 아이디어가 아닌 거다. 처음의 임팩트만 믿고 기획의 목적과 결과는 제대로 고려하지 않은 불성실한 스파크에 불과하다.

처음과 끝이 유려하게 연결되지 않는 기획은 결과물에서도 티가 나기 마련이다. 이 과정을 설계한 나에게도 제대로 와 닿지 않는데, 기획의 과정 없이 결과물만 볼 타겟에게 목적이 정확하게 전달될 리 만무하다. 내 기획이 끼워 맞춘 듯한 억지 없이 자연스럽게 고객을 설득할 만한가를 고민해야 한다.  



3. 실행 가능성

좋은 아이디어는 수없이 많다. 레퍼런스가 얼마나 많고 또 찾기 쉬운 세상인가! 마케터라면 누구나 숟가락이라도 얹어보고 싶을 삐까뻔쩍한 레퍼런스들을 보면 눈이 높아지기 마련이다. 나이키처럼 글로벌 캠페인도 하고 싶고, 젠틀몬스터처럼 이 세상 힙이 아닌 멋진 공간에서 이벤트도 만들어보고 싶어 진다.

하지만 지금 우리 회사에서 실행할 수 있는 기획일까? 지금 스테이지에 적합한 기획일까? 이 부분을 잘 고민해보면 몽실몽실 떠올랐던 아이디어들은 고이 접어 나빌레라- 언젠가 접어둔 이 아이디어들을 다시 꺼내 쓸 수 있는 그 날이 오기만을 바라게 된다.

지금 상황에서 충분히 실행할 수 있는 아이디어여야 논의의 여지와 에너지가 생긴다. 터무니없이 좋기만 한 아이디어는 최악의 아이디어나 다름없다.  



4. 파급력

마음에 드는 아이디어를 실행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는 것에 신이 난 나머지 결과를 제대로 고민해보지 않았던 적이 있었다. 내가 기대한 만큼의 결과가 나오지 않아서 당황스러웠는데 그제야 이 기획의 파급력을 제대로 고려해보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어 아찔했다.

100만 원의 비용을 들여 50만 원어치의 효과를 거둘 수 있다면? 그건 나쁜 기획이다. 100만 원을 들여 100만 원어치의 효과를 거둘 수 있다면? 굳이 해야 하나 싶은 기획이다. 100만 원의 비용을 들였다면 최소한 110만 원 이상의 효과를 거둘 수 있는 기획이어야 한다.

가득 찬 확신으로 시작해도 실패하기 십상이다. 중요한 건 실패했다는 결과가 아니다. 실패를 통해 배우고 같은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으면 그만이다. 그러나 스스로도 결과의 임팩트에 대한 확신이 들지 않는 기획이라면 도전할 가치가 있을까?  



5. 심플함

내가 한 기획을 가장 잘 이해하는 사람은 누굴까? 그건 바로 나! 하나부터 열까지 내 머릿속에서 나온 아이디어일 테니 기획안의 단어 하나만 보아도 전체 기획의 골자가 떠오를 것이다.

하지만 고객도 그럴까? 사실 대중은 내가 하는 일에 큰 관심이 없다. 오감을 현혹하는 콘텐츠가 매분 매초 만들어지는 요즘 세상에 쉽고, 간결하고, 재미있지 않으면 단 1초의 관심도 이끌어낼 수 없다.

며칠 전, 뉴스 기사를 봤다. 요즘 MZ세대는 네이버 페이가 되지 않는 쇼핑몰이라면 최저가라도 이용하지 않는다는 내용이었다. 조금 복잡하긴 해도 플로우가 탄탄하니깐 참여하기 어렵지 않을 거야!라고 기획했던 이벤트가 처참히 묻히는 걸 경험하면서 어렵고 불편하고 번거로운 기획에 동조해 줄 여유 따위는 고객에게 존재하지 않음을 깨달았다. 유치원생도 쉽게 참여할 수 있을 만큼 심플한 플로우. 그게 핵심이다.  



6. 심미성

쏟아지는 콘텐츠 중 유난히 눈이 가는 것들이 있다. 그런 것들은 하나의 공통점을 갖고 있었는데 모두 예쁘다. 그냥 딱 봐도 예쁘다. 모델이 예쁘기도 하고, 분위기가 예쁘기도 하고, 디자인이 예쁘기도 하다. 부담스럽지도 않으면서, 촌스럽지도 않고, 유치하지도 않고, 적당한 세련미를 갖춘. 그러니까 알잘딱깔센 예쁘다.

기획에 담긴 의미가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했던 때가 있었다. 하지만 의미가 좋은 브랜드들은 이제 넘쳐 난다. 저마다 가진 굳건한 신념을 고객에게 알리고 동참을 유도하기 위해서 시끄럽게 광고한다. 그중 살아남는 기획은 브랜드의 생각을 예쁘고 정갈하고 센스 있게 알리는 것들이다. 마지막으로 점검해 보아야 한다. 지나가는 발길을, 무자비한 클릭을 잠깐 멈추게 할 만큼 예쁜 결과물인가.





지난해부터 만들었던 기획안들을 보면서 과거의 서툴렀던 내 모습이 주마등처럼 스쳐갔다. 어설프지만 열정을 다해 켜켜이 쌓아 올린 시간 덕분에 이렇게 나름의 기준을 만들 수 있었다. 이 기준들이 더 많아지길 바란다. 내 기획이 엉성하게 빠져나갈 틈 없이 스스로를, 동료들을, 고객들을 만족시킬 수 있을 만큼 탄탄해지길 바란다. 호기롭게 떠올린 아이디어를 다음날 보았을 때도 부끄러워할 날이 점점 줄어들길 희망하며 내일도 스스로의 기획을 열심히 다듬어봐야겠다.

매거진의 이전글 인생 첫 IMC 캠페인 오답노트 (2)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