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문연이 Aug 26. 2022

아빠와 헤어지는 일

아빠가 세상을 떠난 지 49일째다. 나는 여전히 믿기지 않는 심정으로 아빠의 얼굴을 떠올린다. 한동안은 아예 실감이 나지 않았다. 딸 밥 먹었나 하고 묻는 다정한 음성이, 잠든 나를 깨우는 희고 얇은 피부의 손길이, 연민과 사랑과 미안함으로 가득 차 있던 눈빛이 여전히 생생한데 떠났다니, 우리가 다시는 볼 수 없다니 도무지 받아들일 수가 없어서 어찌해야 할 바를 몰랐다. 아빠를 보내는 내내 생각했다. 한 번만 다시 한번만 돌아와 달라고. 인사라도 하고 가자고. 우리가 어떤 사이인데, 우리가 어떤 인연인데,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데 이렇게 허망하게 헤어질 수 있냐고 몇 번이고 울부짖었다. 아빠가 떠났다는 명징한 명제 앞에서 왜라는 질문이 부질없는 걸 알면서도 악에 받쳐서.


문자 그대로 악에 받쳤다. 하늘이 원망스러웠다. 우리가 같이 얼굴을 맞대고 살았던 시간은 고작 10년이었다. 스무 살이 되어 섬에서 나와 대학교 기숙사에 들어가기 전, 함께 쇼핑을 하고 이제는 자주 볼 수 있다는 희망에 부풀어 나를 배웅해주던 아빠는 불과 두 달이 되지 않아 사고를 당했다. 그 후로 11년을 병원에서 지냈다. 손발을 움직이기는커녕 미음도 삼키지 못하는 상태가 되어 누워있는 아빠를 보러 갔을 때, 차마 병원 문을 열지 못하고 계단에 앉아 벌벌 떨었던 순간이 소름 끼치게 생생하다. 이제 같이 여행도 다니고, 포장마차에서 소주도 마시고, 영화도 볼 생각에 들떴는데 모든 꿈이 산산조각이 났다.


그래도 살아 있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했다. 우리가 함께 꿈꿔왔던 미래를 그릴 수는 없지만 그래도 아빠가 곁에 있어서 다행이라는 마음과 앞으로 남은 아빠의 시간을 어떻게든 책임져야 한다는 부담과 그 무거운 짐을 오롯이 나에게 지운 아빠를 향한 미움과 세상에서 나를 가장 사랑해주는 아빠를 미워하는 나쁜 딸이라는 자책을 모두 끌어안고 버텼다. 어쨌든 아빠는 내 곁에 있으니까. 내가 세상에 태어난 후 단 한 번도 나를 사랑하지 않은 적이 없는 아빠였으니까. 아빠를 떠올릴 때마다 드는 양가감정에 숨이 막힐 것 같기도 했지만 감당할 수 있었다.


그렇게 아빠와 내가 각자의 방식으로 각자의 상황을 버틴 보람이 이제야 돌아왔다고 생각했다. 올해 4월, 늘 병원 밖 생활을 그리워하던 아빠에게 독립의 기회가 찾아왔다. 복지센터에서 도와주신 덕분에 임대 아파트를 얻을 수 있었다. 지형이 높은 곳에 있어서 좀 더 기다려보자는 나의 만류에도 아빠는 완강했다. 이미 들뜬 티가 나는 아빠를 더 말릴 수 없어서 퇴원을 결정했다.


이사하는 날, 아빠는 벌써 짐을 다 싸 두고 나와 동생을 기다리고 있었다. 새집으로 들어가기 전, 아빠의 퇴원과 독립을 기념하기 위해 짧은 여행을 떠났다. 광안대교가 한눈에 보이는 멋진 숙소를 예약하고 맛있는 음식들을 잔뜩 시켜 함께 나눠 먹었다. 아빠는 태양이 밝게 비춰 윤슬로 반짝이는 거실 창밖의 바다를 한참 보고 있었다. 나도 그 옆에 앉아 같이 바다를 바라봤다.


아빠는 감회가 새로웠는지 당신의 누나, 그러니까 우리 고모에게 전화를 걸어 연이랑 신이가 청소도 다 해주고, 살림도 다 사줬다고 자랑했다. 다음날 침대와 TV까지 배송이 완료되자 아빠는 바로 사진을 찍어 내게 전송했다. 주말마다 오늘은 김치찌개를 해 먹었고, 오늘은 생선구이를 해 먹었다며 아빠는 잘 챙겨 먹고 있으니 나에게도 끼니를 놓치지 말라고 신신당부를 했다.


병원에 있을 때보다 훨씬 경쾌해진 아빠의 목소리를 듣는 게 좋았다. 아빠가 혼자 사는 게 걱정스러워서 내심 퇴원하고 싶다는 아빠를 퉁명스럽게 대했던 게 미안했다. 이제 아빠에게 해줄 수 있는 게 더 많아졌다는 사실이 반가웠다. 더 열심히 일하고 많이 벌어서 좀 더 멀리 여행도 가고 용돈도 많이 드려야지 생각하니 꽤 괜찮은 딸이 된 것 같아 뿌듯했다. 어리석게 들떴고 어리석게 미뤘다. 이 시간이 이렇게 짧을 줄도 모르고.


화가 난다. 세상에 멀쩡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데. 동네 구석에 있는 작은 카페에도, 평일 서울 한복판을 지나는 버스 안에도, 그 버스가 지나는 골목골목에도 사람들이 가득한데. 왜 우리 아빠는 여기 없을까. 왜. 어쩔 수 없이 세월이 흘러서 떠나도, 불의의 사고가 났어도 작별 인사 정도는 하고 가는 사람들도 많은데. 왜 우리 아빠는 그럴 수도 없었을까. 왜. 누군가에게는 당연하듯 주어진 시간이, 축복처럼 얻게 된 기회가 왜 우리에게는 허락되지 않는 건지. 원망스럽고 화가 난다.


그립다. 이제 보고 싶다와 그립다의 차이를 알겠다. 보고 싶다는 볼 수 있는 상황에서 보고 싶을 때 쓰는 말, 그립다는 이제 다시는 볼 수 없으니 내 마음에서, 내 머릿속에서 당신의 얼굴을 목소리를 손길을 부단히 그려볼 수밖에 없을 때 쓰는 말. 아빠가 딸 하고 다정하게 부르는 그 목소리가 너무 듣고 싶어서 그럴 수만 있으면 잠시라도 아빠가 있는 곳으로 달려가고 싶다. 통화를 끊을 때마다 해줬던 사랑한다는 말을 한 번만이라도 더 듣고 싶어서 그립다. 견딜 수 없이 그립다.


어쩔 줄을 모르겠다. 황량하게 떠난 아빠의 마지막을 생각하면 마음이 무거워진다. 이대로 체중계에 올라가면 기계가 고장날 것처럼 무거워서 명치가 턱 막히고 멀미가 난다. 그러다가도 공허하다. 분명 가득 차있는데 그 가운데가 뻥 뚫린 느낌이다. 마음에 커다란 블랙홀 하나가 생겨버린 것 같다. 모든 걸 빨아들이지만 아무것도 남기지 않는 블랙홀. 그런 마음을 도무지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어서 그냥 놔버린다. 할 수 있는 게 없다.


어떤 슬픔은 완전히 사라질 수 없다는 걸 깨달았다. 그 슬픔은 깊은 곳에 침잠해있다가 슬픔의 원인과 관련 있는 자그마한 조각 하나에도 금세 떠올라 가슴을 찢어발긴다.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슬픔을 안고 살 운명임을 자각하는 순간 무력해진다. 이제 나는 평생 이 슬픔과 함께 살겠구나. 종종 이렇게 가슴을 치며 울겠구나. 빤히 보이는 미래가 벌써 비통하다. 인생에 필연적으로 찾아오는 대부분의 시련을 극복할 수 있다고, 바꿀 수 있다고 믿으면서 살았는데 이 사라질 수 없는 슬픔만은 섣불리 감당하겠다고 말할 수가 없다.


슬픔이 밀려올 때마다 물 먹은 솜이 가슴부터 입안을 가득 채우는 듯한 이 갑갑한 느낌은 평생 적응되지 않을 것만 같고, 나에게 화가 났다가 당신이 원망스럽다가 세상이 미워지는 이 복잡한 감정의 변화는 날이 갈수록 그 진폭이 커져서 무뎌질 기미가 보이지 않기 때문에. 머리가 멍해질 정도로 울고 난 뒤 퉁퉁 부어 반쯤 떠지는 눈으로 바라보는 세상 속에 존재하고 싶은 기분이 들지 않기 때문에. 터덜터덜 의식적으로 발을 끌듯 움직이며 생각한다. 어떤 슬픔은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다고.


우리의 인연은 여기 까지라는 사실을. 아빠는 좋은 곳으로 가서 이곳에는 없다는 현실을. 장례를 마치고 집에 돌아와서 네이버에 검색해봤다. 아빠가 돌아가신 후 미안함. 죄책감. 후회. 검색어를 쓰면서도 이런 글을 올리는 사람이 있을까 싶었는데 놀랍게도 많은 사람들이 지식인에 글을 남겨뒀다. 같은 고통을 공유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이 잔인하면서도 진실한 위로가 되었다.


간 사람은 이미 갔고 산 사람은 살아야 한다고 말하는데, 제대로 살 수도 그렇다고 살지 않을 수도 없는 상태에서 난사된 총알처럼 나를 관통하는 수많은 감정들 때문에 당황스럽고 허망한 와중에 이 글을 보게 되었다면. 우리 그래도 이 시간도 다 지나갈 거라 믿고 조금만 더 견뎌보자. 조금만 더 힘을 내서 씩씩하게 이 슬픔 속을 걸어가 보자. 저마다의 슬픔을 안고 누군가도 앞서 걸었을 길이니까. 나는 이렇게 이름도 얼굴도 모르지만 나와 비슷한 이별을 한 사람들에게 기대어 아빠와 헤어지는 중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우리들의 치유하는 시간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