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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연이 Dec 21. 2024

나를 미워하는 것을 그만두기


돌아보면 꽤 오랫동안 나를 미워했다. 지난 이십 대가 고통스러웠던 이유도 그 때문이었다. 이상은 높으나 현실은 그에 한참 미치지 못하는 나를 모르고 헛발질만 해댔던. 내가 어떤 사람인지 모르고 연애를 하고 우정을 쌓고 일을 했으니 삐걱대지 않을 수 없었다. 깊은 숲 속에서 자꾸만 같은 길을 헤매고 있는 것 같은 기분으로 살았다. 자주 우울했고 힘겨웠고 방황했다. 


문제는 이 방황이 나 안에서만 끝난 게 아니라는 거였다. 나를 미워한다는 사실을 모르고 미워하니, 아니 사실은 내가 미워한다는 사실을 피하려고 하니 그 미움은 내 안에서 승화되지 못하고 다른 곳으로 도망가버렸다 자꾸. 그래서 다른 사람을 미워하고 원망하고 탓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건 이십 대 후반에 맞이한 이별 후였다. 그와 나는 서로를 꽤 비슷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자기 연민, 자기 비하, 그걸 외면하려는 과잉된 자의식과 방어적 태도. 그래서 가까워졌던 걸까. 자신을 마음껏 사랑해 줄 자신이 없는 두 사람이 만났으니 자신을 닮은 사람에게도 진실로 다정하거나 아껴주지 못했다. 나약하고 불완전한 나를 품어주고 알아주길 바래서 서로를 필요로 했던 것일 텐데 그 정도의 마음그릇이 되질 못했다. 그렇게 서로가 서로에게, 자신이 자신에게 준 상처가 뒤섞여 원망과 자책 끝에 이별했다. 이미 충분한 징조가 있던 예고된 헤어짐이었는데도 후유증이 심했다. 


입이 깔깔해서 밥을 먹을 수 없었고 가슴이 답답해서 잠들 수가 없었다. 터지기 직전 힘껏 팽창한 풍선을 끌어안고 있는 것처럼 갑갑하고 조마조마한 기분으로 하루하루를 보냈다. 가만히 앉아있거나 누워있으면 이대로 폭발해보릴 것만 같아서 살기 위해 시도 때도 없이 집밖으로 뛰쳐나가 길을 걸었다. 걸음걸음마다 원망을 쏟았다. 내가 뭘 잘못했니. 니가 뭔데 나를 이렇게 만드니. 시간이 조금 지나고 나니 궁금해졌다. 너는 왜 그랬을까. 나는 왜 그랬을까. 질문을 거듭한 끝에 다다른 곳에서는 '너'는 사라지고 '나'만 남았다. 나였다. 문제도, 해답도 나였다.


그가 미웠던 순간을 돌아보면서 알게 된 건, 그 미운 점이 실은 내 안에도 있었다는 사실이었다. 내가 외면했던 나의 못난 모습을 그에게서 볼 때마다 적절한 꼬투리를 잡아 그를 책망하고 비난했던 것이다. 유레카. 이 사실을 깨닫고 나니 소중한 보물을 발견한 탐험가가 된 것처럼 통쾌한 기분이 들었다. 물론 이별의 원인이 그 때문만은 아니었겠으나 이외의 이유는 더 이상 중요하지 않았다. 사는 내내 나를 괴롭혔던 문제의 실마리를 드디어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문제도, 해답도 나였다. 


'메타인지' 나에게 부족한 건 메타인지였다. 내가 누구인지 정확하게 아는 능력. 나는 내가 되고 싶은 사람이 되기 위해 여러 겹으로 나를 포장했다. '이 정도는 되어야지, 남들 다 이렇게 하는데 너도 해야지,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해야지' 스스로를 늘 부족하고 완벽하지 못한 사람이라고 생각했기에 그걸 들키지 않기 위해 부단히 애썼다. 내가 가진 능력을 제대로 볼 줄 몰랐고, 내 한계를 정확히 인식하지 않았다. 강점은 부풀리려고 하고 약점은 숨기려고만 하면서 피카소가 그린 그림처럼 내 모습을 스스로 왜곡했다. 


허지웅 작가의 <살고 싶다는 농담>에서 미국의 한 신학자가 쓴 기도문을 보았다. 

"바꿀 수 없는 것을 받아들일 평온을 허락하시고, 바꿀 수 있는 것을 바꿀 용기를 주십시오. 그리고 이 두 가지를 분별할 수 있는 지혜를 주십시오."


어떻게 살아야 할까를 고민할 때마다 머릿속에 여러 갈래로 나있던 길이 이 문장을 본 후 내가 바꿀 수 없는 것과 바꿀 수 있는 것, 단 두 가지의 길로 단순해졌다. 내가 가진 것을 무엇으로 분류할 수 있을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거기엔 어떤 가치 판단이 개입되지 않았다. 부족한 것, 모자란 것, 나쁜 것, 못난 것의 태그가 사라지고 '내가 가진 것 중 바꿀 수 없는 것'이라는 단 하나의 태그만이 남았다. 생각을 바꾸니 숨기고 싶었던 약점이 '용기 있게 받아들여야 할 나의 조각'으로 바뀌었다. 


머리로 아는 것을 마음으로 이해하는 것, 즉 용기를 내는 것은 결코 쉽지 않았다. 십수 년간 반복했던 자기 비하와 혐오가 그렇게 쉽게 사라질 리 만무했다. 글로 싸웠다. 자꾸만 걸어왔던 어둡고 컴컴한 길로만 가려는 생각의 방향을 바꾸기 위해 펜과 종이를 삽과 망치 삼아 새로운 표지판을 세우고, 밝은 쪽으로 길을 냈다. 자아는 계속 도발했다. 너 정말 괜찮은 사람이야? 지금과 다르게 살 용기가 있어? 사실 그건 용기가 아니라 포기 아니야? 도태될까 봐 두렵지 않아? 때로는 멈췄고 때로는 무너졌지만 계속 항거했다. 옳은 길은 절대 쉽게 갈 수 없다는 믿음으로 버티며 쓰고 생각하고 행동했다. 


책을 읽고 나를 제대로 바라보려는 노력을 한 지 5년이 지나간다. 여전히 나는 내가 어렵다. 그렇지만 동시에 흥미롭다. 늘 나를 작게만 여기고 남들과 비교하기에 급급했는데, 내가 가진 면면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삐뚤지 않게 드러내려고 노력하는 나 자신이 아직도 낯설고 신기하다. 더욱 신기한 것은 나를 바라보는 렌즈를 바꾸니 남을 바라보는 시선도 바뀌었다는 것이다. 예전의 내게 타인은 경쟁과 질투의 대상이었다. 지금은 나의 확장판 같다. '나도 완전하지 않고, 당신도 완전하지 않을 텐데 우리 이렇게 노력하면서 살고 있네요. 참 대견하네요.' 이 마음의 변화가 너무나 드라마틱해서 믿기지 않을 정도이지만 사실이다. 


<힘 빼기의 기술>에서 김하나 작가가 이런 문장을 썼다. 

'사랑은 개체에서 전체를 발견하는 것'이라는 말을 좋아하는데, 한 사람을 진정으로 사랑해 본 자만이 인류를, 나아가서는 전 존재를 진정으로 사랑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누군가를 제대로 사랑하려면 가장 먼저 나를 제대로 사랑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을 마침내 경험한 것이다. 


연말이다. 올 한 해를 돌아보며 한 문장으로 마무리를 한다면 '나를 미워하는 것을 그만둔 해'라고 할 수 있겠다. 우리가 산다면 얼마나 길게 살까. 우리가 함께 한다면 또 얼마나 오래 함께 할 수 있을까. 찰나다. 시간은 늘 순식간에 지나가고 아쉬움은 보낸 시간의 곱절로 남는다. 덜 아쉬워하며 살고 싶다. 지난 시간을, 놓친 사랑을. 혹시나 나를 미워하는 데, 또는 누군가를 미워하는 데 시간을 쓰고 있다면 부디 그 힘든 마음을 내려놓고 나 자신을 꼭 끌어안아 보라는 말을 건네고 싶다. 언젠가 다시 내가 미워지는 순간이 올 때 누군가 내게 이런 말을 건네주길 바라며.






생각을 바꾸기 위해 스스로에게 던진 질문들을 차곡차곡 쌓아놓았어요. 나와 비슷한 시간을 통과하고 있는 분들과 함께 고난을 헤쳐나가기 위해 질문을 나누고, 나를 돌아보고, 무엇이든 쓰는 시간을 만들어보려고 해요. 관심이 있는 분들은 신청해 보시면 좋겠어요. 2025년의 첫 시작이 더욱 가뿐해질 거라 확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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