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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집이 그리워서

사실 집보다는 엄마가 그리웠다.

by 문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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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사에서 판교역 쪽으로 걸어오는 길에는 50m 정도 되는 구불한 나무다리를 건넌다. 밑으로는 잔잔히 흘러가는 탄천과 규모는 작지만 꽤 다부지게 우거진 숲이 있다. 눈 따가운 네온 공해와 시끄럽게 오가는 자동차들의 매연 틈에서 거의 유일하게 흙냄새를 맡을 수 있는 곳이다. 바깥공기가 쐬고 싶어 터벅터벅 걸어오다 별 생각 없이 다리를 건넜는데 흙냄새가 화살처럼 스쳐갔다. 아주 잠시였지만 한 장면이 강하게 떠올랐다. 고향 집이었다. 뒷산 때문인지 문을 나서면 옅은 흙냄새가 느껴지는 우리 집. 아 그립긴 한가보다. 판교에서 울릉도가 떠오르다니 말이다.




IMGP0805.JPG 우리 집 앞은 아니고, 내가 울릉도에서 가장 좋아하는 곳 중 한 곳.


엄밀히 말하면 내 고향은 아니다. 엄마의 고향이지. 10살 때 우리 가족은 부산에서 울릉도로 이사를 갔다. 꼬박 10년을 채워 산 첫 동네라는 이유로 고작 주민등록번호 뒷자리로는 반증할 수 없게 이 곳을 내 고향으로 삼기로 했다. (사전적 의미에 맞는 내 고향은 경주다. 경주에선 2년 정도 살았고 당연히 기억은 없다.)


찰나의 흙냄새에서 뿌려진 고향의 향수는 이렇듯 재채기처럼 갑자기 찾아온다. 한 여름날, 아스팔트 길을 걷다 너무 더워 그대로 뛰어가 바다에 풍덩 빠지고 싶을 때, 저녁 메뉴를 고민하다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할머니의 오징어 된장찌개 맛이 떠오를 때, 아침에 눈을 떴는데 기름값을 아끼느라 보일러를 틀지 않아 이불 밖 공기가 얼음송곳처럼 날카로울 때. 번뜩 여름에도 찬 데서 자면 안 된다며 보일러를 틀어주던 엄마가 떠오른다. 그럴 때면 인생이 참 부질없게 느껴지기도 한다. 내가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자고 엄마 품에서 벗어나 이 고생을 하고 있는지.


지난 5월에는 가정의 달답게 적절히 찾아온 그리움을 이기지 못하고 집에 갔다. 엄마에겐 비밀로 하고 어버이날에 맞춰 배를 탄 것이다. 생각해보니 6년 만이었다. 어버이날을 엄마랑 보낸 게. 만약 내가 그때 마음을 돌리지 않았더라면 아마 9년 만이 되었을 수도 있겠다 생각하니 아찔해졌다.


IMG_9763.JPG 야심차게 용돈박스도 준비했다.




울릉도는 포항에서 217km, (지방 사람들은 자기 지역과 연관된 이런 정보에 훤하다.) 배로만 육지와 3시간 떨어진 곳이라 특히 교육환경이 열악하다. 고등학교에선 문과 밖에 선택할 수 없고, 배울 수 있는 사회 과목 역시 정해져 있다. 수학 선생님이 미술을 함께 가르치실 정도니 말 다했다. 아무튼 이런 곳이라 중학교 때 성적이 좋았던 나는 경주여고로 진학하려고 했었다. 엄마의 제안이었다. 선생님도 그 편이 좋을 거라고 하셨고 차근차근 진학 절차를 밟고 있었다. 진학과 동시에 집을 떠날 마음의 준비도 해야했다.


그러던 어느 날, 집에 들어와 보니 엄마가 울고 있었다. 엄마는 나를 보더니 안 가면 안 되겠냐고 물었다. 품 안에 계속 두려고 해도 스무 살이 되면 어차피 떠나보내야 하는데 3년이나 일찍 나를 떠나보낼 자신이 없다며 엄마는 내 앞에서 엉엉 울었다. 복잡한 집안 사정을 구구절절 읊지 않아도 그 자체로 슬픈 일이다. 엄마가 딸을 떠나보낸다는 건.




IMG_9808.JPG 내가 졸업한 울릉초등학교. 처음으로 엄마랑 같이 투표도 했다.


결국 나는 울릉고등학교로 진학했다. 엄마의 후배가 되어 엄마와 같은 교복을 입었다. 딱 3년 후, 수능을 거하게 말아먹었을 때 엄마는 다시 나를 안고 그때처럼 울었다. 미안하다고. 엄마 때문이라고. 하지만 나는 그 순간을 결코 단 한 번도 후회한 적이 없다. 아직도 밤이면 갑자기 엄마가 보고 싶어서 우는 난데 어느 때보다 촉촉한 감수성을 지녔던 여고생 시절, 엄마가 곁에 없다는 공허함보다 더 가슴 에이는 아픔은 내 삶에 없었을 것이다. 용기 내어 날 붙잡아준 엄마가 난 너무 고맙다.


원래는 엄마 이야기를 쓸 요량이 아니었다. 울릉도 이야기나 하면서 고향의 추억을 떠올려볼 참이었는데, 아까 마신 장미향 짙게 베인 만천 원짜리 맥주 한 잔 덕분인지 장미를 닮은 엄마가 계속 떠오른다. 이럴 땐 그립단 이유로 무턱대고 전화하면 안 된다. "응 딸~" 하는 엄마의 다정한 목소리가 어김없이 눈물을 불러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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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엄마가 그립지 않을 날이 올까? 만 번을 불러도 고스란히 내 눈가의 우물로 남을 당신. 바라건대 남은 평생을 가까이 있진 못해도, 함께 존재하는 시간만큼은 멀어지지 않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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