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질이 을매나 재밌게요? 그리고.
오랫동안 덕질 해온 것들이 몇몇 있다. 내 덕질에는 물증이 많지 않아 (이를 테면 앨범 개수, 콘서트 티켓 앨범, 포스터 두께, 굿즈) 정확한 수치로 증명해 보일 길은 없지만, 그게 무슨 상관이랴? 소비를 유쾌하게 생각하지 않는 나에게 덕질의 물증이란 하등 상관없는 것이다. 무언가에 마음 쓰는 것을 감정 낭비라고 생각하지 않는 것 자체가 내겐 사랑이다. 그것도 아주 깊은 사랑.
그렇다. 나는 소비하는 걸 좋아하지 않는다. 처음부터 그런 건 아니었고 어릴 적 가난했던 시절, 갖고 싶은 게 있어도 눈치가 보여 갖고 싶다고 말하지 못했으니 그때부터 생긴 습관 아닌 습관이 아닐까 싶다. 내 사전에 충동구매란 금지어와 같았고, 정말 필요한 것 예를 들어 이불이라던가 세제라던가 이런 생필품을 살 때조차 정말 나한테 필요한 건지 고민한다. 아니 세제가 없으면 뭘로 설거지를 할 건데? 영 멍청한 짓이긴 한데 어쩔 수 없다. 옷 하나를 살 때도 한 달 고민하는 건 예사 일이다.
마음 쓰는 일 역시 별반 다르지 않다. 나 먹고살기도 바빠 죽겠는데 누군가에게 마음을 쓰고 감정을 소비한다는 건 엄청난 스트레스다. 남친과 조그만 싸움을 할 때도 짜증이 솟구친다. 안 그래도 크지 않았던 애정이 금세 식는다. 연애가 오래 가지 못하는 이유 중 하나일 것이다. 물론 그 단단한 장벽을 넘는 사람들이 있다. 가족과 열 손가락을 간신히 넘기는 머릿 수의 친구들이다. 그리고 내 덕질의 대상들.
첫 번째는 제라드.
맞다. 스티븐 제라드, 리버풀의 심장, 영원한 캡틴. 중학생 시절, 축구를 보거나 하는 것 외에는 별달리 할 것이 없었던 섬이라 남자아이들은 유난히 축구에 미쳐있었다. 리버풀 팬으로 새벽 경기를 챙겨보는 건 기본이고, 등 뒤에 제라드 8을 새겨 레플리카까지 주문해 입던 남자 친구를 따라 나도 축구의 재미에 빠졌다. 또래 여자들은 모두 토레스가 제일 잘생겼다며 입을 모았지만 나는 유독 제라드에 꽂혀 빠져나오질 못했다. (그 후, 토레스는 이적시장 마지막 날 헬기를 타고 홀연히 런던으로 떠났다. 나의 예기치 않은 예지력에 건배!) 근엄한 너구리 상에 건장한 체구에 그보다 더 우직한 그의 로열티와 리더십은 고작 열여섯 중학생의 마음을 빼앗기에 충분했다.
그리고 십여 년이 흘렀다. 무럭무럭 자라 스물셋이 된 나는 그 해 여름 유럽여행을 떠났다. 한 달 하고도 일주일 동안 이십 대 초반의 체력을 뽐내며 두 발로 열심히 유럽 대륙을 누볐다. 오스트리아에서 시작한 약 45일간의 여정의 종착지는 영국이었다. 그렇다 영국. 그때의 내게 영국은 왕궁이나 뮤지컬의 나라가 아니었다. 오로지 축구의 나라. 여행을 떠나기 전, 울릉읍사무소에서 알바를 하면서 네이버 초시계까지 동원해 리버풀 에버튼 전 티켓팅을 놓쳤지만 실패했었다. 그래도 영국까지 왔는데 어떻게 리버풀을 한 번 안 가볼 수 있겠냐 하고 떠나기 이틀 전 일정에 넣어두었는데, 신의 한 수였다. 안 그래도 프랑스 안시의 호스텔에서 리버풀 경기를 보고 있던 날이었다. 카톡이 왔다. 리버풀 팬이었던 전 남자 친구가 내 표를 구해준 것이었다.
피곤한 몸을 이끌고 새벽 기차에 올라 리버풀에 내렸던 날이 여전히 선명하다. 영국답게 날은 흐렸고, 안필드 (리버풀 FC 구장) 까지 가는 버스를 묻는 내게 부쉬 부쉬라고 대답해준 그의 사투리는 너무나 알아듣기 힘들었지만 그 무엇도 내 흥을 가라앉게 만들 수는 없었다. 그 날 우리는 졌다. 리버풀에서 숙소를 구하지 못해 새벽 5시 런던행 버스를 타기 위해 리버풀 역 밖에서 오들오들 떨며 노숙까지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참 겁대가리 없는 일지만은 그때는 뵈는 게 없었다. 제라드를 봤으니 아무렴 상관이 없었다. 나는 한국으로 돌아왔고, 잠시 LA로 떠난 그 역시 다시 리버풀로 돌아왔다. 은퇴를 선언했던 날, 퇴근길 버스에서 코를 훌쩍이며 눈물을 흘렸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내 캡틴이고, 지금도 회사 컴퓨터 위엔 리버풀에서 직접 찍은 제라드의 사진이 턱 하니 붙여져 있다. 소리가 들린다. YOU'LL NEVER WALK ALONE.
두 번째 덕질의 대상은 신화다.
초등학교 6학년 때부터 시작했던 이 덕질은 스물여섯 내 인생의 반을 차지하게 되었다. 아직도 여전하며, 앞으로도 영원할 테니 내년부턴 절반을 넘게 된다. 왜 좋아하게 됐는지 기억도 안 난다. 내가 열셋이었을 때, 또래 여자아이들에게 신화는 이미 늙은이들이었다. 동방에서 온 다섯 명의 풋풋한 남성들이 하루만 네 방에 침대가 되고 싶다고 다가와서는 대한민국을 흔들어놨을 시절이었다. 물론 나는 그들의 유혹에 꿈쩍도 하지 않았다. 이미 신화 오빠들의 생일과 혈액형, 이상형까지 조사하느라 한창 바빴다.
중학교 올라가서는 교과서며 필기구며 책상이며 주변 1m 반경에는 신화가 가득했다. 컬러 프린트가 되는 문구점에 찾아가 오빠들의 얼굴 옆에 '1등 하면 결혼하자' 말풍선을 새겨 놓은 이름표와 시간표를 인쇄해 오려 붙인 것이다. 울릉도 섬 소녀에게 콘서트는 어불성설이었고, 다만 개그돌로도 이름을 떨쳤던 오빠들의 예능감 덕분에 TV를 틀었다 하면 나와 리모컨을 붙들고 살았다. 세이클럽이든 싸이월드든 내 미니홈피 사진첩의 폴더 하나는 늘 신화 몫이었다. 신화는 내게 그냥 아이돌이 아니었다. 울면서 잠든 날이 많았던 어린 시절, 256mb 아이리버 mp3에 꽉꽉 채워진 신화 노래는 내게 위로였고, 치유였다.
대학생활을 하러 부산에 올라왔을 때는 신화의 잠정 활동 중단기였다. 멤버들의 군대 때문에 거의 3-4년을 쉬었다. 지난 콘서트 DVD만 줄기차게 돌려보며 기다렸다. 내 음악 리스트에 그들이 빠진 적은 한 번도 없었다. This Love로 컴백했을 때, 먼저 공개된 뮤직비디오를 봤을 떈 정말 쓰러지는 줄 알았다. 심장이 너무 빨리 뛰어서. 이건 덕질을 해본 이들만 알 수 있는 감정일 거다 분명. 그들은 내 존재를 알지도 못할 텐데, 무슨 첫사랑을 10년 만에 만나기라도 한 듯 설레서 미쳐버릴 것 같았다. 난 사랑하는 이들과의 이별에 신물이 나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이 덕질이 더 소중하고, 이들에게 늘 고맙다. 이유야 어찌 되었든 (내년이면) 데뷔 20주년 최장수 아이돌로 변함없이 활동하고 있다. 물론 그동안 논란도 많았고, 그런 논란이 생길 때마다 가장 가슴 아파하는 것은 팬이지만 그래도 놓지 못하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아직도 콘서트만 가면 울고, 출근길 랜덤 재생으로 흘러나오는 신화 노래에 몸을 들썩이고, 잠들기 전 슬픈 감정이 밀려올 때면 그들의 음악으로 위로받는다.
나와 연결고리가 없는 사람을 이렇게나 사랑할 수 있다는 사실을 믿지 못하는 사람들도, 혹은 하찮게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다. 자기 가수에게 통 큰 선물을 한 팬들을 다룬 기사엔 늘 '그 돈으로 엄마 아빠한테나 잘 해라'라고 쓴소리를 가장한 악플이 달린다. 기분 나쁜 건 잠시고 이젠 안쓰럽다. 응답하라 1997에서 성시원은 이렇게 말한다. '빠순이의 기본은 열정! 그 열정으로 얼마나 열심히 살아가는데' 덕질은 나의 힘이다. 내가 좋아하는 이들에게 초라하지 않은 팬이 되기 위해서, 열심히 돈을 벌어 그들을 더 자주 만나기 위해서 열심히 살게 된다. 첫눈처럼 나에게 다가와 운명처럼 오랜 시간 함께 한 이들이, 그리고 이 감정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모든 덕질러들이 행복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