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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연이 Nov 05. 2017

세상이 물든 시간, 바토무슈에서 본 노을

노을을 닮고 싶다.


비가 왔던 첫날과 달리 아침부터 구름 없이 맑은 하늘에 기분 좋았던 하루였다. 좋아하던 뤽상부르 공원에 가 하루종이 따뜻한 햇살을 즐기고는 저녁 먹기 전, 잠시 쉬기 위해 집으로 갔다. 문득 오늘 노을이 참 예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곤 한국에서부터 다짐했던 그것 '노을 질 시간에 바토무슈 타기' 가 떠올랐다. 바토무슈는 이상하게 한국에서 표를 사는 것이 약 50% 저렴했다. 그래 봤자 몇 천 원 차이긴 하는데 풍족하지 않은 여행객에겐 몇 천원이 몇 만 원과 다를 바가 없지 않겠는가. 우리가 출발했던 10월 4일부터 10일까지는 한국의 공휴일이었으니 표를 살 수가 없었고 11일쯤 바토무슈 티켓을 저렴하게 판매하는 사이트에서 구매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바로 오늘 (10월 7일) 난데없이 날이 너무 아름다운 것이다. 


현재 시간은 5시 20분. 바토무슈는 7시 40분 즈음이면 해가 진다. 7시 바토무슈를 타려면 지금 바로 튀어 나가 지하철을 타고 선착장으로 가야 한다. 어쩌지 어쩌지. 그래 가자. 오늘 못 타면 후회하겠다. 누워 있는 동생을 재촉해 다시 집을 나섰다. 도착하기 전까지도 몰랐다. 이 선택이 내가 올해 한 것 중 가장 잘한 선택이 될 줄. 





Bonsoir couchant


당신,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있나요?




일몰 시간에 바토무슈 타기 는 우리 계획표에만 들어 있던 건 아니었나 보다. 선착장은 저마다의 버킷리스트를 품은 채 좋은 자리를 선점하려는 사람들로 이미 북적이고 있었다. 우리는 뒤쳐진 후발주자였다. 좋은 풍경 보기는 글렀겠구나 하고 체념할 때, 저녁 바토무슈에는 칼바람이 분다는 소식에 겁을 먹은 사람들이 앞이 뻥 뚫린 명당자리를 내어준 채 안쪽 자리로 들어가고 있었다. 우리는 굴러들어 온 복을 놓치지 않았고 잠깐의 추위 따위 버텨내면 그만이라는 생각으로 앞좌석에 자리를 잡았다. 


이미 3년 전 비슷한 자리에서 센강을 바라보았던 경험이 있는 나였지만 그땐 해가 진 후의 야경을 보았던 터라 눈 앞에 펼쳐질 일몰의 마법이 기대될 수밖에 없었다. 반면 신이는 그냥 마법이고 뭐고 혼자 신이 나 아이처럼 방방 뛰고 있는 누나 옆을 떠날 수가 없어 묶여있는 강아지처럼 얌전히 앉아있었다. 


바토무슈는 부드럽게 출발했다. 하늘은 여전히 푸르렀지만 건물 곳곳에 노을의 색감이 입혀지기 시작했다. 기분이 이상했다. 얼굴에는 시원한 강바람이 불어오고 있었고 눈 안에 들어오는 모든 풍경이 낯설었지만 따뜻했다. 무섭게 달리는 차도, 눈을 따갑게 하는 네온도, 시끄러운 소음도 없었다. 족히 몇 백 년은 되어 보이는 건물들을 뒤로하고 사랑하는 사람과 강가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며, 연신 셔터를 누르고 있는 우리에게 손을 흔들며, 앞만 보고 부드럽게 페달을 밟으며 내 시야를 스쳐갔다. 이 풍경 속에 빠름 이라는 단어는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이 순간의 속도는 내가 한국에서 보낸 속도보다 0.5배 정도는 느렸다. 


하나도 답답하지 않은 느림이었다.





마음의 온도를 높여주었던 인사





You are not alone. 




아마도 가장 아름다운 퇴근길



지는 석양 사이로 비치는 에펠탑의 모습 하며, 평온한 모습으로 다리 위를 건너는 사람들의 실루엣 하며. 카메라에 온전히 담기지 않을 거란 걸 알면서도 이 순간 속에 내가 있었다는 걸 오래 기억하고 싶어서 계속 셔터를 눌러댔다. 





개와 늑대의 시간




해가 지고 하늘이 자몽 빛으로 물들어가는 시간 속에 가만히 드러 앉아 있었다. 하는 일이라곤 가만히 바라보는 일뿐인데 신이라도 된 것처럼 세상을 다 가진 기분이었다. 맥이 탁 풀린다. 바삐 움직인 하루가 기차처럼 타다다닥 스쳐갔다. '어차피 다 이렇게 져버리는걸 왜 그렇게 아등바등하고 살았을까.' 갑자기 생기는 물음에 지는 해가 넌지시 말을 건넨다. '그렇게 아등바등 살 것 없다.' 그건 회의에 물든 타박이 아니었다. 


높이 떠있는 동안 얼마나 열심히 살았는지 다 보았다. 

그래도 다 이렇게 지는 것 아니겠니. 그러니 쉬엄쉬엄하렴. 


하고 건네는 위로였다. 이미 충분히 나를 품어주던 세상이 어느새 붉게 익어 더 따뜻하게 안아주었다. 모든 지는 모습이 이렇게만 아름답다면 나 역시 져가는 걸 두려워할 필요가 없겠구나. 





비로소 사방이 캄캄해지고 곳곳에 조명이 들어섰다. 빛은 이미 다 삼켜 먹히고 없는데 난 여전히 희미한 푸름 위에 씌워진 노을을 그린다. 앞으로도 노을을 만날 날들은 숱히 많을 테지만 어김없이 이 날이 겹쳐 떠오를 것 같다. 모든 곳에서 볼 수 있지만 모든 곳에 다르게 찾아온다. 그래서 그 순간을 더 특별하게 만든다. 

그런 노을을 닮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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