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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연이 Jan 14. 2018

너의 행복에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람이 될게

인종차별에도 브뤼셀이 고마웠던 이유

와 진짜 오길 잘한 거 같다


3,000종의 맥주가 넘게 있어 현지인이고 관광객이고 할 것 없이 몰려든다는 델리리움 펍에 갔다. 신이는 천국이라도 만난 듯 눈이 휘둥그레졌다. 신나게 맥주를 마시고 있는데 아주 오랜만에 인종차별을 당해버렸다. 방금만 해도 맥주가 살아있다며 들떠있던 내 기분이 180도 급변하니 신이도 내 눈치가 보였는지 영 기쁘게 웃질 못했다. 


숙소로 돌아가는 길, 오면서 봤던 맥주 가게에 들렀다. 수도원에 직접 가보고 싶어 했을 정도로 먹고 싶어 했던, 맥주의 끝판왕이라 불리는 베스트블레테렌 (westvleteren) 을 발견하자마자 분위기가 달라졌다. 본격적인 맥주 사냥에 나선 것이다. 바구니를 꽉 쥔 두 손에서 경건함까지 느껴졌다. 제대하고 10kg 가 넘게 찐 몸으로 숲 속을 날아다니는 새처럼 경쾌하게 가게를 휘저었다. 영어에 자신 없다며 모든 의사소통을 내게 맡겼던 전과 달리 거의 빙의한 사람처럼 종업원과 이야기까지 나눴다. 신이가 태어난 이래, 이렇게 설레어하는 모습은 처음이었다. 


그렇게 고른 맥주 10병에 15만 원이 훌쩍 넘었다. 계산기에 찍힌 어마 무시한 가격에 놀란 내게 한국에서 사면 30만 원도 넘었을 거라며 머뭇거림 없이 계산을 마쳤다. 맥주가 가득 담긴 봉투를 받아 든 모습 주변으로 행복이 넘실거리고 있었다. 좀 전까지만 해도 인종차별의 억울함에 벨기에에 대한 적대감이 샘솟던 내게도 그 기운이 전해졌다. 우리는 어느 때보다 신난 마음과 무거운 두 손을 안고 숙소로 걸어갔다. 



베스트블레테렌은 라벨도 없었다. 병뚜껑 색으로 종류를 구분하는데 간지 폭발

숙소로 돌아와 말끔히 씻고 자리를 잡았다. 신이는 한껏 상기된 표정으로 쇼핑백을 헤쳤다. 혹시라도 깨질까 싶어 갓 태어난 아기 다루듯 하나하나 소중히 사진을 찍고 시식을 위해 일렬종대로 놓았다. 맥주를 딸 때 한 번도 망설임이 없던 신이었는데, 오늘은 별 4개 장군 맞이하는 일병이라도 된 것처럼 긴장한 모습으로 맥주를 마주하고 있었다. 이게 뭐라고 저렇게까지 긴장하나 싶어 웃기기도 하고, 본 적 없던 열정이 느껴져 신기하기도 했다. 


파리에서 벨기에 가는 기차 안

손까지 경직된 모양인지 한 번에 따지지가 않아 몇 번 버벅거린 후에야 첫 맥주의 뚜껑이 열렸다. 우아한 손짓으로 병 근처에 코를 갖다 대었다. 향을 먼저 느껴야 한다나 뭐라나. 그리곤 전용잔에 도르륵도르륵 맥주를 붓기 시작했다. 거품이 구름처럼 넘실거렸다. 파리에서 브뤼셀로 오는 기차 안에서 본 구름보다 더 폭신해 보였다. 더 신기한 건 소리였다. 병에서 갓 탈출한 맥주가 안도의 한숨이라도 내쉬는 것처럼 여기저기서 푸시식 푸시식 거렸다. 코로 한 번, 귀로 두 번 즐긴 후에야 입의 차례가 되었다. 한 모금 꿀꺽하고 넘겨내자 '그래 이거지' 하는 신이 얼굴 위로 봄이 번졌다. 바라보는 나까지 웃음이 나는 미소였다. 그렇게 좋냐 물으니 반짝이는 눈과 씰룩 이는 입가가 먼저 대답했다.


살다 보니 이런 날도 있구나. 내가 벨기에에서 이걸 진짜 마셔보는구나
누나 난 이제 이 여행에서 더 바랄 게 없다
누나 이건 진짜 어디 가서 자랑해도 된다. 


신이는 흥분하면 말이 많아진다. 한 모금 마시고 고개를 까딱하며 '와...' 또 한 모금 마시고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크'. 연신 이어지는 감탄사와 맥주 지식을 뱉어내며 베스트블레테렌부터 로슈포르, 오르발, 치메이까지 나는 생전 처음 들어보지만 맥주 마니아들에겐 대단한 명성을 떨친다는 맥주들 사이에서 행복에 취해가고 있었다.


누나도 마셔봐라
됐다 니 많이 마셔라
아이다 행복은 나눠야 된다.
ㅋㅋㅋ그만큼 좋나
와 진짜 감동이다.




어느 때보다 순수한 모습으로 기쁨에 취한 신이를 보니 괜히 코 끝이 찡했다. 이렇게나 좋아하는데 뭔가 더 해주지 못하는 미안함, 혼자서 자기가 하고 싶은걸 찾아내고 고민하고 도전하는 모습에 대한 고마움에 기특하고 대견한 마음까지 더해져 정말 괜히 눈물이 났다.


신이 전공은 사실 내가 정해준 거였다. 엄마가 바빠 끼니를 잘 챙겨주지 못할 때면 성을 내고 대충 때워버리던 나와 다르게 신이는 뚝딱뚝딱 뭔가를 만들어 먹었다. 그런 모습이 인상 깊어서 요리를 배워보면 어떻냐고 물었다. 엄마는 내심 취업이 쉬운 공장 쪽으로 갈 수 있는 전공을 선택하길 바랐지만 난 결사반대했고, 신이도 내 생각에 동의해 조리학과로 진학했다. 


그러다 어떤 계기로 술에 관심이 생긴 모양이다. 아르바이트한 돈으로 각종 술을 사서 먹어보고, 혼자 인터넷과 책을 뒤지며 공부했다. 나는 전문가가 아니라 그 수준의 정도를 정확하게 파악하진 못하지만 '나 술 꽤나 먹었다' 하고 으스대는 사람들과는 분명 차이가 있어 보였다. 저 맥주는 어디 꺼야? 종류가 뭐야? 람빅이랑 트라피스트는 무슨 차인데? 듀벨이랑 콰트로는 어떻게 달라? 꼬치꼬치 캐묻는 내 질문에 단 한 번의 막힘 없이 술술 답을 읊었다. 


아 조리과 가지 말고 처음부터 이 쪽으로 공부할 걸
니가 조리과를 갔으니까 여기에도 관심이 생긴 거지. 세상에 이유 없는 결과는 없다.
오 그러네.. ㅇㄱㄹㅇ ㅂㅂㅂㄱ
ㅃㅂㅋㅌ지 


여행 오기 전, 교수님 등쌀에 면접을 보았던 레스토랑에서 합격했다는 전화가 왔지만 하고 싶은 게 따로 있다며 거절했다. 신이는 맥주를 배워 끝내는 자기만의 맥주를 만들고 싶어 한다. 이 흐름의 끝이 어디든 나는 신이가 구렁으로만 빠지지 않는다면 어디든 함께 할 거다. 오늘 신이가 행복해하는 순간을 가장 가까이에서 지켜보며 다짐했다. 신이가 원하는 일을 가장 응원해주고 또 도움이 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겠다고. 언제나 신이의 행복에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그 순간이 곧 내게도 행복이라고.


착한 내 동생, 순수한 신이. 예쁜 신이. 언제나 행복하자 오늘처럼. 




2017년 10월 9일, 브뤼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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