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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연이 Aug 07. 2018

자발적으로 고립되기

평창에서의 에캉스 첫 번째 날

푱창


한 사람의 몫으로 주어진 인류애에 가뭄이 내린 상반기였다. 7월의 초입에 들기 전 곰곰이 생각해보니 가난해진 마음에 기를 빼앗긴 나머지 6개월 내내 제대로 한 게 없는 듯한 허무함이 들었다. 도망치고 싶었다. 시끄러운 사람도, 쏘다니는 차도, 빽빽이 들어선 건물도 없는 곳으로 스스로를 고립시키고 싶었다. 그러자면 어설픈 여행지여서는 안됐다. 그런 곳엔 이미 검색에 부지런한 한국인들의 소란이 넘쳐날 테니. 일단 위치는 강원도로 정했다. 바다면 바다 산이면 산이 있는 곳이었고, 집에서 가기도 편했다. 고립지를 찾는 방법은 생각보다 단순했다. 에어비앤비에 강원도 세 글자만 입력하면 끝. 세상에 자가가 없는 사람은 나뿐인 듯 수많은 집들이 쏟아져 나왔다. 여긴 너무 관광지고, 여긴 너무 아파트다 싶은 곳들을 지나 어느 한 집의 소개에 눈길이 머물렀다. 고즈넉한 산 아래 LP 앤 BOOK 오두막.



고즈넉, 산, LP, BOOK, 오두막.

어쩜 내가 좋아하는 것들만 끌어다 모아 놓았을까. 올해 본 문장 중 최고였다. 인공지능이 내 니즈를 파악해서 조합해 만들어 놓은 건 아닐까 싶었다. 애초의 계획은 1박 2일이었는데 이 곳 주인장의 방침은 달랐다. 이런 곳에 묵는 이유라면 온전한 쉼이 필요해서 일 것이고, 온전히 쉬자면 적어도 2박은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영업을 이렇게나 낭만적으로 하는데 넘어가지 않을 요량이 내게는 없었다. 그렇게 나는 원래 2박 3일을 계획했던 사람처럼 홀린 듯 금요일 연차를 냈고, 예약 버튼을 눌렀다. 어린 왕자에서 여우는 어린 왕자가 4시에 온다면 저 자신은 3시부터 행복해질 거라 말했다. 나는 7월 13일에 떠나는 여행 덕분에 6월 28일부터 행복했다.


고립될 것에 설레고, 낯섦에 걱정하며 2주를 보냈다. 느지막한 아침에 ‘드디어 가는구나’ 하는 생각과 눈을 떴다. 짐이랄 건 크게 없었지만 주변에 마트가 없다는 이야기에 바리바리 산 만두와 김치찌개, 와인과 과자 일체가 복병이긴 했다. 이걸 끌고 동서울터미널까지 갈 엄두가 나지 않아 기꺼이 택시를 잡았다. 그렇게 2 영업일 정도의 노동시간과 택시비를 맞바꾸어 안온한 여행길을 시작했다. 무사히 터미널에 도착해 운교 터미널로 향하는 버스에 올랐다.



그렇다. 목적지는 평창에 있는 작은 마을 운교였다.

출발 전 카카오 지도에 주소를 처넣고 두 손가락으로 화면을 아무리 확대해도 고작 치안센터와 카 공업사만 표시되어있을 만큼 외진 곳이었다. 조금만 확대해도 각종 상점들의 이름이 개미떼처럼 찍혀있는 서울과는 차원이 달랐다. 지하철 노선도 대신 등고선이 보이는 지도라니. 도착도 하기 전에 소나무 숲에라도 온 듯 힐링되는 기분에 몸서리가 쳐졌다.

버스는 크고 작은 차들 사이를 비껴 무사히 도심을 빠져나갔다. 이때를 위해 만들어진 듯한 노래들이 흘러나오는 이어폰을 귀에 꽂고, 최애라도 마주한 듯 뿌듯한 미소를 걸치고는 창밖으로 끝없이 이어지는 초록의 향연을 눈에 담았다. 과연 국토의 70%가 산인 나라다운 면모였다. 버스는 씩씩하게 내달리며 해발을 표시해놓은 표지판을 지나갔다.

2시간 정도 흘러 조그마한 운교 정류장에 도착했다. 건너편에는 작은 정자를 가진 파출소와 파출소보다 더 오래 그 마을을 지켜왔을 법한 백운 상회가 있었다. 도로 한가운데서는 커다란 레미콘들이 그곳과는 영 어울리지 않는 굉음을 내며 공사에 한창이었다. 소주와 맥주 같은 주류는 백운 상회에서 사면된다는 호스트의 팁에 충실한 다리로 도착하자마자 길을 건넜다. 7월 초부터 맹렬히 쏟아내리는 햇빛에 지쳐 보이는 주인 할아버지께 인사를 하고, 소주와 맥주를 골고루 집어 든 뒤 계산을 마쳤다. 호스트가 타이밍 좋게 데리러 나왔다. 정류장 뒤에 난 오르막길로 농사가 한창임을 증명하는 듯 배추잎을 꼬리처럼 달고 가는 트럭 뒤를 따라 5분 정도 올라가니 2박 3일간 내 안식처가 되어줄 집이 등장했다.


호스트는 번잡스러운 인사치레 없이 담백한 설명을 끝내고 돌아갔다.

온전한 나만의 고립이 시작되었다. 이 곳 저곳 방을 둘러보다가 LP판 앞에 자리를 잡았다. 손때 묻은 LP들이 책장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무슨 일이든 첫 단추를 잘 끼우는 것이 가장 중요하므로 첫 곡은 존 레논의 Imagine으로 골랐다. 실체를 알 수 없는 무엇과 치열한 전쟁 중이던 내 마음속에 곧장 평화가 찾아왔다.

노랫말을 흥얼거리며 72시간의 평화를 함께할 노래들을 마저 골라내었다. 첫 번째 막중한 임무를 끝낸 후 편한 옷으로 갈아입고 침대에 몸을 뉘었다. 어느 하나 마음에 걸리는 것 없는 공의 상태가 참말로 오랜만이라 생경했다. 육신마저 공허해져 유체이탈이라도 한 듯 붕 뜬 느낌이었다. 그렇게 맑게 개인 마음을 가지고, 그보다 더 맑은 하늘이 펼쳐진 바깥으로 뛰어들었다. 차 한 대가 겨우 다닐 수 있는 길 옆으로는 불어오는 바람에 서로 부딪혀 알싸한 소리를 내는 나무들로 가득했다. 오랜만에 맡아보는 파릇한 풀냄새에 정신이 다 아득해졌다. 이런 곳에만 산다면 몽골인 부럽지 않은 시력을 가졌을 텐데 싶을 만큼 눈에 닿는 풍경 족족 편안했다. 눈을 찌르는 듯한 네온사인은 고사하고 어느 하나 인위적이고 자극적인 장면이 없었다.

길가에는 ‘나무’라고 불리는 호스트의 반려견이 꼬리를 흔들고 있었다. 야생동물 뺨치는 비주얼에도 불구하고, 사람을 원체 잘 따른다며 가끔 손님들의 가이드를 해주기도 한다는 호스트의 말이 떠올랐다. 나무는 ‘개팔자가 상팔자’라는 속담 속 그 개 같았다. 산책하려는 나를 능숙하게 안내하다가 땀이 나기 시작해 돌아가려는 나를 다시 능숙하게 버려두고 제 갈 길을 갔다.

옆에서 나무(식물)를 치고 계시던 아랫집 아저씨는 혹시 집 나가는 게 아닐까 전전긍긍하는 나를 보곤 나무(동물)는 이 동네 한량이라며, 손님이 오면 저렇게 안내를 해주다 혼자 삘을 받아 저 아래 개울에서 혼자 물놀이를 하고 온다는 정겨운 TMI를 알려주셨다. 아 나무는 ‘개썅마이웨이’의 그 개이기도 하구나. 저렇게 살고 싶다는 부러움을 안고 길가의 둔턱에 올랐다. 하늘은 어느새 핑크빛으로 물들어가고 있었다. 폐가 두 개였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떠오를 만큼 맑은 공기를 마시며 운교에서 첫날밤을 맞이했다.



두 번째 날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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