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이없지, 싸이월드가 내 꿈의 시작이었다니!
어릴 적 수많은 별명 중 하나가 익스프레셔니스트 였다. 짐작하는 대로 표현을 뜻하는 Expression 에 사람을 뜻하는 접미사 ist 를 붙인 것이다. 실재하는 단어이긴 그 단어의 의미는 내 별명의 뜻에 견줄 바가 되지 않을 만큼 심오하고, 나는 단지 직독 직해하듯 내 감정 표현에 능해서 얻게 된 별명이다. 감정마다 얼굴 근육이 제각기 만들어내는 표정과 자기보다 덩치 큰 생물은 피한다는 상어도 거뜬히 물리칠 과장된 몸짓, 연극 대본을 보는 것 같다는 일기 역시 한몫했다.
학창 시절의 무덤이라 불리는 싸이월드가 흥행할 당시, 나 역시 학교에서 받은 상품권은 모조리 도토리로 바꾸어버렸던 다람쥐 시절이 있었다. 포도알 모으기에 큰 흥미는 없었지만 별 시시콜콜한 것부터 싸운 남자 친구를 익명으로 저격하는 저주글까지 참 다양한 글을(흑역사를) 남겼더랬다. 일종의 하루 소회를 쓴 것뿐인데 친구들 사이에선 꽤 인기가 좋았다. 일부러 내 일기를 보러 들어오는 친구도 있었다. 내 글에서 목소리가 들린대나 뭐라나. 돌이켜보면 그때가 시작이었던 듯싶다.
그렇게 콘텐츠 마케터가 되었다. (뜬금) 사실 어릴 적 꿈은 아나운서였는데. (더 뜬금) 초등학교 내내 이 꿈은 변한 적이 없었다. 그때는 내가 쓰는 말이 사투리 인지도 몰랐고, 표준어가 따로 있는지도 몰랐다. 엄마 아빠 선생님 그 누구도 내게 그 점을 지적하지 않았다. 이토록 편견 없는 분들 덕분에 긍정적인 아이로 클 수 있었다. 심심한 감사의 말씀을 전한다.
다시 돌아와, 사실 내 전공은 마케팅과는 크게 상관이 없었다. 아노미 상태가 극에 달한 고3 무렵, 진작 아나운서 꿈은 포기했는데 당최 뭐가 돼야 할지를 모르겠는 거다. 선생님은 전공을 정해야 한다며 장래희망을 써내라고 닦달만 해댔다. 나는 엄마한테 '맨날 국영수만 가르치고 뭘 할 수 있는지는 가르쳐주지도 않아놓고 무턱대로 장래희망을 써오라는 건 폭력 아니냐!' 하고 버럭 화풀이를 했다. 엄마는 얘가 갑자기 왜 이러냐는 표정으로 그냥 니가 좋아하는 걸 하라고 했다. 당시 R 발음의 매력에 푹 빠져 있던 나는 그대로 영문과에 갔다. 4년 동안 영어만 배우다 보면 회화는 기깔나게 하지 않을까 하는 부푼 (헛된) 꿈을 안고.
하지만 대학 가서 얻은 건 사람과 술과 술과 술뿐
그러다 국제 개발 분야에 관심이 생겨 복수 전공으로 국제학을 선택했다. 배움이 깊어질수록 '나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도 행복하게 하는 삶을 살고 싶다.'는 열망이 강해졌다. 다만 이 꿈을 이루는 데는 여러 가지 방법이 있었다. 일단 방향은 찾았으니 그 길을 갈 수단만 찾으면 되는 셈이었다. 그러다 우연히 지금 다니는 회사의 채용공고를 보게 된 것이다. (스타트업에서 일하는 건 어떤지 궁금하다면?)
스물셋에 첫 입사를 하고 이러 저러 그러한 일을 겪은 후 지금 나는 첫 회사의 콘텐츠 마케터가 되었다. 평생 콘텐츠 마케터로 살 수 있을지도 모르겠고, 그럴 마음도 없지만 현재 가장 나에게 잘 어울리는 일이자 잘 해보고 싶은 일임은 분명하다. 내가 겪어보지 못했던 일을 경험한 숱한 이들의 이야기를 듣는 것, 그리고 그들의 이야기와 진심이 잘 전해질 수 있도록 다시 이야기를 만드는 것에 짜릿한 즐거움과 따뜻한 보람을 느낀다.
이 매거진에서는 콘텐츠 마케터로 지내며 경험한 이야기를 전하고자 한다. 깊은 통찰력이나 진득한 경력을 담긴 힘들겠지만 대신 엉뚱한 인사이트와 풋풋한 경험들을 나누며 비슷한 고민을 하는 분들과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