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비애로 가는 차, 그러나 나아감을 믿는 바퀴

유발 하라리의 <사피엔스>를 읽고

by 문연이
KakaoTalk_20190209_213857836.jpg <아마존의 눈물> 캡쳐

사피엔스의 행복이 망가지기 시작한 건, 아니 사피엔스가 다른 동물들과 달리 행복을 갈망할 수밖에 없게끔 프로그래밍된 건 농업혁명 이후부터라고 한다. 수렵 채집의 시기 때만 하더라도 우리는 가족들의 배를 부르게 할 식량만을 채집해 끼니를 채우기만 하면 되었다. <아마존의 눈물>이라는 다큐멘터리에서 본 조에족만 하더라도 하루 일과라고는 아침에 눈을 떠 남자들은 사냥을 떠나 부족이 먹을 만큼의 동물을 사냥해오고, 여자들은 아이들을 돌보고 요리를 하고, 함께 먹고 놀다가 자는 일이 전부였다.


하지만 잉여 자원을 쟁여 두고 안락한 삶을 유지하려는 욕심에 숲을 태워 논밭을 만들고 씨앗을 뿌리며 본격적으로 농업을 시작했고 그것이 돌이킬 수 없는 변화를 가져온 것이다.


커다란 논은 짐승처럼 옮길 수 있는 것이 아니었으므로 사피엔스의 생활 모습은 유목에서 정착으로, 수렵 채집에서 농업 노동으로, 분수를 알고 자연과의 균형을 맞추는 삶에서 더 많이 가지고 빼앗으려는 욕구의 삶으로 변해갔다. 가져야 하고 지켜야 할 것이 생겼고, '비가 오지 않아 농사를 망치면 어쩌나.', '누가 내 것을 빼앗으러 오면 어쩌나.' 하는 걱정이 생기기 시작했다. 농업을 시작하며 사피엔스는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불안감에 발목 잡혔고 꼼짝없이 노동의 굴레에 속박되어 버렸다.


농업을 선택한 후부터 돌이킬 수도, 멈출 수도 없는 사피엔스의 고행이 시작되었다. 돌이킬 것이 없는 삶에 만족하지 못한 나머지 돌이킬 수 없는 선택의 연속극이 되어버린 인생의 함정에 빠진 것이다. 돌이킬 수 없는. 돌이킬 수 없는.



KakaoTalk_20190209_213936778.jpg <사피엔스>의 마지막 페이지


책을 읽는 내내 생은 오롯이 나의 것인 듯 가면을 쓰고 있지만 사실 나는 생의 인형극에서 놀아나고 있는 꼭두각시에 불과할 뿐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허무하고 무력하고 무지하며 무참한 인형극의 꼭두각시.


내가 존재하는 근본적인 이유는 철학적으로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것은 오직 생물학적인 설명, 그저 진화했기에 존재하는 것에 불과하다는 것으로만 설명할 수 있다. 그렇다면 질문은 다음 단계로 넘어가야 한다. 진화에 의해 우연으로 탄생했고, 필연으로 소멸할 나는 그 우연과 필연 사이에서 무력하게 서 있을 것인가.


'생'의 이유는 우연이지만 '삶'의 이유는 보다 의미 있는 것이기를 바란다는 출처 모를 욕망이 뜨거운 심장 속에서 꿈틀거렸다. 그것이 거창하고 위대할 필요는 없겠지만 그럼에도 이 땅 위에 발을 딛고 숨을 쉬게 된 이상, 내 소멸은 허무할 지라도 탄생에서 소멸까지 주어진 시간만큼은 아름다웠으면 하는 바람이 본능처럼 일었다. 과연 무엇이 이 삶을 아름답게 만들 것인가.



삶의 의미란 무엇일까?

그 물음이 전부였다. 이 단순한 물음이 세월이 흘러가면서 밀려들곤 했다. 위대한 계시가 밝혀진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아마도 위대한 계시가 찾아오는 일은 결코 없을 것이다. 대신 사소한 일상의 기적이나 등불, 어둠 속에서 뜻밖에 켜진 성냥불이 있을 뿐이었다.

- 버지니아 울프, 등대로



첫 번째는 역시 사람이었다. 내가 사랑하는 가족과 친구, 연인. 이들의 따뜻한 사랑 덕분에 나는 가끔 내 존재를 무력하게 만드는 세상의 숱한 곡절 속에서도 흔들릴지언정 부러지지 않고 살아남을 수 있었다.


두 번째는 너그러움이었다. 욕심을 내려놓고, 미움을 버리고, 모든 일을 너그럽게 받아들이는 일. 너그러워지는 것은 분노, 울화, 증오 등의 투박한 감정을 이해와 포용이라는 끌을 사용 해 매끄럽게 조각하는 일이다. 이 과정이 순조롭게 끝나면 세련된 조각품이 완성된다. 그것은 품위라는 것이다.


세 번째는 만족이었다. 내가 가진 것에 만족하고 필요나 분수 이상의 것을 욕심내지 않는 것이다. 이는 쉽게 '더 나아지려는 시도'와 상충된다. 나 역시 때로는 두 갈래 길의 기로에 서서 혼란스러워한다. 여기서 한 발짝 더 내딛으려는 것이 분수에 맞지 않는 욕심인지 나아지려는 시도인지. 결국에는 삶의 지혜가 올바른 길로 빛을 밝혀주리라 믿는다. 그 지혜를 얻기 위해 부지런히 책을 읽고, 글을 쓰는 것이다.


생은 허무하다. 무엇을 채워 넣는 사라지고 만다. 억지로 발버둥 치며 살아가는 생도, 유유히 흘러가는 생도 모두 사라지고 만다. 그 점에서 생은 소름 돋게 공평하다. 그러나 삶은 공정하지 않다. 모든 삶의 시작점, 채워진 양이 다르므로 본질적으로 불공정하다. 이 불공정함에 불평불만만 늘어놓는 것은 허무의 깊이만을 늘릴 뿐이다. (물론 불공정의 차이를 줄이려는 모든 노력은 가치 있다. 이 노력이야말로 허무의 공허를 메우는 것이라 생각한다.) 불평 대신 내게 주어진 조건 안에서 최선을 다해 사랑하고, 살아가는 것이 삶을 아름답게 만들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 아닐까 생각한다.


나는 비애로 가는 차, 그러나 나아감을 믿는 바퀴.

허수경 시인의 시를 빌려 감히 삶을 이렇게 정의해본다. 결코 쉽지는 않겠지만 반드시 아름다워질 수 있는 것이 우리의 삶일 것이라고 되뇌어 본다. 생이 허무하고 삶이 눈부셔서 코 끝이 시린 밤이다. 소멸한 이도 살아가는 이도 대단해서 꼭 안아주고 싶은 밤이다. 내 곁에 실재하는 모든 이들이, 그리고 내가 존재 자체만으로 아름다워 가슴이 벅차오르는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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