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을 지배하는 자
“신이 당신에게 어떤 초능력을 선물한다면 어떤 능력을 갖고 싶은가요?”
일어나지 않을 걸 알면서도 온갖 상상을 자아내는 이 질문을 앞에 두고 두 개의 답을 떠올렸다. 오래 전부터 갖고 싶은 능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첫째는 시간을 돌리는 능력,
둘째는 상심한 사람을 위로하는 능력.
꼼꼼하지 못해 잔실수가 많고, 다정하지 못해 따뜻한 말을 잘 건네지 못하는 나는 이런 초능력에라도 기대 내 부족한 점과 정을 메우고 싶었다. 그러나 고민의 전제가 잘못되었음을 느꼈다. 초능력이라함은 초자연적인 현상에서 비롯되는 정신적인 힘인데 위로하는 능력은 굳이 초자연적인 현상이 없어도 내가 노력만 한다면 충분히 갖출 수 있는 것이었다. 게으름으로 몇 분의 시간을 지체한 끝에 한 가지 답을 고를 수 있었다.
시간을 지배하는 자!
공부한답시고 의자에 앉아있는 시간은 많았으나 투입하는 비용 대비 얻는 이익은 그리 크지 않았던 나는 늘 나의 애매한 포지션에 답답함을 느꼈다. 괜히 공부 열심히 하는 착한 딸 코스프레 하다가 초중학교 때 조금 잘 받은 성적으로 고등학교에 진학한 탓이었다. 엄마와 학교의 기대는 한껏 높아져있는데 정작 내 적성은 놀고 먹는 한량이었다. “아싸리 처음부터 놀아버릴걸! 시간이라도 돌려서 최대한 책을 멀리하는 학생이 되고 싶다.” 좁은 동물원에 갇혀 광활한 사바나 초원을 가로지르던 지난 날을 그리워하는 한 마리의 사자처럼 헝클어진 머리로 좁은 책상 앞에 앉아 꼼짝없이 공부하고 졸기를 반복하던 나는 그렇게 철없이 시간을 돌리는 능력을 꿈꿔왔더랬다.
이후에도 일련의 사건들을 거치며 시간을 돌릴 수 있다면 울릉도로 이사오지 못하게 엄마아빠에게 떼를 부렸을텐데, 수능 정답을 외워서 더 좋은 학교에 진학할 수 있었을텐데, 아빠 사고를 막을 수도 있고, 공황장애를 겪지 않을 수도 있고, 나를 아프게 한 그 사람을 만나지 않을 수도 있었을텐데 하며 초능력을 갈망했었다.
최고의 순간과 최악의 순간
그러다 며칠 전, 친구가 물었다. “올해 최고의 순간을 꼽자면?” 질문을 듣자마자 얼굴에 눈꽃처럼 시원한 미소가 번지게 할만큼 행복했던 순간들이 파노라마처럼 착착착착 스쳤다. “그럼 최악의 순간은?” 이란 물음 후에는 상영이 끝나고 암전된 극장처럼 머릿 속이 캄캄해졌다. 신이가 잠시 아팠을 때, 친구에게 속상한 일이 있었을 때를 빼고는 최악이라 꼽을 만한 일이 떠오르지 않았다. 구태여 시계 태엽을 돌려 시간을 되돌리고 싶은 순간이 없었다.
김영민 교수는 <아침에는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 좋다.> 라는 책에 이런 글을 남겼다.
우리는 태어나고, 자라고, 상처 입고, 그러다가 결국 자기 주변 사람의 죽음을 알게 된다. 인간의 유한함을 알게 되는 이러한 성장 과정은 무시무시한 것이지만 그 과정을 통해 확장된 시야는 삶이라는 이름의 전함을 관조할 수 있게 해준다. 그 관조 속에서 상처 입은 삶조차 비로소 심미적인 향유의 대상이 된다. 이 아름다움의 향유를 위해 꼭 필요한 것은 시야의 확대와 상처의 존재다.
이어지는 글에서 그는 성장 과정에서 불가피하게 얻을 수 밖에 없는 상처와 그 상처마저 아름다워보일 수 있게끔 해주는 확장된 시야가 더 나은 삶을 만들어준다고 말한다. 시간을 돌리는 능력은 이렇게 겨우 얻은 상처를 없는 것으로 만들고, 결국 시야를 가려버리는 방해물일 뿐인 것이다.
모든 일어난 일에는 이유가 있다.
돌아보니 그랬다. 앞서 말했던, 시간을 돌리고 싶었던 그 시간들이 아니었다면 지금의 나는 만들어질 수 없었다. 울릉도에 오지 않았다면 9290 친구들을 만날 수도 없었을 것이고, 더 좋은 학교에 갔다면 독수리를 만날 수 없었다. 아빠의 사고는 정말 일어나지 않았다면 좋았겠지만 가족의 소중함을 처절하게 깨닫게 해준 순간이기도 했다. 그때는 지옥을 사는 것 같았던 공황장애는 내 안의 목소리에 귀 기울일 수 있는 기회와, 같은 상황을 겪은 주변 친구들의 마음을 진심으로 이해할 수 있는 공감능력을 주었다. 나를 수없이 울게 했던 그 사람은 그만큼 뜨거운 사랑을 알게 해주었다. 작게 작게 시간을 돌리고 싶었던 실수들이 없었다면 반성과 나아짐도 없었을 것이다.
며칠 전 유진이가 써준 생일 축하 편지에 이런 내용이 적혀 있었다.
멋진 삶을 살고 있어서 어깨에 짐이 한가득일텐데 우리에게 가끔 내려놓고 투정도 부려줘. 우리가 언제나 너에게 휴가 같은 기쁨을 선사해줬으면 해.
입시 때 잠깐의 절망을 견디지 못해 시간을 돌려버려 이런 친구를 만나지 못했다면, 그건 정말 상상조차 하고 싶지 않은 불행이다. 시간을 되돌리고 싶은 순간이 와도 그 순간을 보듬어줄 힘이 생겼고, 사람들이 곁에 있다. 그리하여 이제 내게 시간을 돌리는 능력은 필요치않다. 그 능력 대신 한 1억만 준다면 감사히 친구들 데리고 크루즈 여행이나 다녀오련다.
It’s about time.
시간을 돌리는 능력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영화 <어바웃 타임> 에서 끝내 시간 여행을 하지 않게 된 주인공의 나레이션이 마음 깊이 남는다.
“인생은 모두가 함께 하는 여행이다. 매일을 살면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최선을 다해 이 여행을 만끽하는 것이다.”
다가올 2019년의 끝에도 “최악의 순간은?” 이라는 물음에 시간을 되돌리고 싶을 만큼의 순간은 없으리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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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out time 은 직역하자면 시간에 대하여 라는 의미지만 ‘일어났어야 하는 일’이라는 뜻도 있다고 한다. 나만 몰랐다면... 시간을 돌리고 싶을테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