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스트리아 그라츠에서 이동한 크로아티아 수도 자그레브(Zagreb)
오스트리아의 그라츠(Graz)에서 크로아티아의 수도 자그레브(Zagreb)로 향하는 플릭스버스에 몸을 실었다.
그라츠에서 자그레브로 가는 길은 슬로베니아를 경유하는 루트로, 중간에 잠시 슬로베니아의 어느 도시에서 정차한 후 다시 출발했다.
오스트리아를 떠나 슬로베니아를 지나 크로아티아에 도착하기까지 여권 검사는 전혀 없었다.
자그레브 버스터미널에 도착하니, 숙소까지 거리는 멀지 않아 도보로 이동하기로 했다.
하지만 도착하자마자 느낀 첫인상은 그다지 밝지만은 않았다.
터미널은 낡고 허름했고, 그 주변 풍경도 썩 깔끔하지 않았다.
숙소로 향하는 길목에서 ‘Kathmandu Mart’라는 간판이 눈에 띄었다.
네팔 마트가 있다는 건, 아마 자그레브에 적지 않은 네팔 근로자들이 일하고 있다는 뜻일 것이다.
숙소에 짐을 풀고 시내를 둘러보기 위해 밖으로 나섰다.
목적지는 반 옐라치치 광장(Ban Jelačić Square)으로 걸으며 둘러본 자그레브 시내는 전반적으로 낡고 깨끗하지 않은 느낌이었고, 어디선가 은은하게 매캐한 냄새가 퍼졌다.
낙후된 분위기 속에서도, 사람들의 움직임이 있는 도시의 생명력은 느껴졌다.
옐라치치 광장에 도착하니 마침 크리스마스 마켓이 열리고 있었다.
크로아티아의 민족 영웅, 옐라치치 총독의 동상이 광장의 중심을 지키고 있었고, 주변에는 상점과 카페, 레스토랑이 들어서 있어 제법 활기찼다.
광장에서 조금 걸어 로트르샤크 탑(Lotrščak Tower)을 찾아갔다.
세계에서 가장 짧다는 푸니쿨라(케이블카)가 연결되어 있지만 계단을 이용해 올라갔다.
로트르샤크 탑은 매일 정오에 대포를 쏘는 전통이 있다고 하는데, 그 광경을 볼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전망대를 찾았지만 잠겨 있어 아쉬움이 남았다.
탑 뒤편에는 이름부터 독특한 “실연 박물관(Museum of Broken Relationships)”이 있다.
전 세계의 이별 이야기를 모아둔 공간이라는데, 그냥 지나쳤다.
조금 더 걸으니 성 마르코 교회(St. Mark’s Church)가 나왔다.
화려한 타일 지붕이 인상적인 이 교회는 크로아티아, 달마티아, 슬라보니아의 문장을 담고 있다.
아쉽게도 리모델링 중이라 내부에는 들어갈 수 없었지만, 외관만으로도 충분히 아름다웠다.
성당에서 아래로 내려오면 Stone Gate가 나타난다.
중세 시대의 유적이자 종교적 성지인 이 문 안에는 성모 마리아의 성화가 모셔져 있다.
Stone Gate를 지나니 카페와 기마상이 눈에 띄었다.
걷다 보니, 자그레브 중심부의 지하 터널 입구가 나타났다.
궁금한 마음에 들어가 보았다.
나중에 검색해 보니, 이 터널은 ‘그르이크 터널(Grič Tunnel)’이라 한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피난처와 방공호로 사용되었던 곳으로, 지금은 전시와 문화행사를 위한 공간으로 개방되어 있다.
약 350m 길이의 이 터널은 도심 속 지름길 역할도 한다.
그러나 내부 공기는 매우 탁했고, 무엇보다 환기 시설이 시급해 보였다.
터널을 나와 걷던 중, 한글 간판이 보였다.
한국인 여행객이 많이 찾는 도시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어서 자그레브의 대표 거리 중 하나인 티칼치체바 거리(Tkalčićeva Street)를 걸었다.
카페, 바, 레스토랑이 줄지어 있어 현지 분위기를 제대로 느낄 수 있는 곳이다.
이 거리에는 크로아티아 최초의 여성 저널리스트이자 인기 작가였던 ‘마리야 유리치 자고르카(Marija Jurić Zagorka)’의 동상이 서 있다.
조금 더 걸어가니 돌라츠(Dolac) 재래시장이 나왔다.
이곳에는 “페트리카 케렘프(Petrica Kerempuh)”의 동상이 서 있다.
그는 크로아티아 민중의 목소리를 대변한 풍자적인 인물로, 권력과 사회의 모순을 조롱했던 방랑 이야기꾼이자 익살꾼이었다고 한다.
돌라츠 시장이 이 동상을 품은 이유도, 그곳이 전통적으로 서민들이 모여 삶과 문화를 나누던 공간이기 때문이다.
아쉽게도 오후 늦은 시간이라 시장은 이미 문을 닫아 있었다.
시장에서 조금만 걸어가면 자그레브 대성당이 있는데, 이곳 또한 보수공사 중이라 내부는 들어갈 수 없었다.
숙소로 돌아오는 길에도 크리스마스 마켓이 열려 있었다.
크리스마스가 지난 시점이라 이걸 “크리스마스 마켓”이라고 불러야 할지는 모르겠지만, 겨울 분위기는 그대로 살아 있었다.
옐라치치 광장 근처에는 니콜라 테슬라(Nikola Tesla)의 동상이 있다.
그는 크로아티아 출신의 세르비아계 미국인으로, 교류 전력 시스템(AC)을 개발한 전기 기술의 선구자이다.
그의 업적은 세계적으로 인정받고 있으며, 크로아티아와 세르비아 양국 모두 그를 자국의 인물로 기리려 애쓰고 있다.
크로아티아는 테슬라 박물관을 운영 중이고, 세르비아는 베오그라드 국제공항 이름을 “니콜라 테슬라 국제공항”으로 바꾸었을 정도다.
참고로, 동방견문록의 저자 마르코 폴로 또한 크로아티아 출신이라는 점은 흥미롭다.
숙소로 돌아가는 길에 ‘히말라얀 호스텔’이라는 간판을 봤다.
앞서 본 카트만두 마트와 더불어, 자그레브에 많은 네팔 사람들이 거주하고 있는 듯하다.
낯선 도시에서 만난 익숙한 이름들이 묘한 위안을 안겨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