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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리랑카의 상징 시기리야(Sigiriya)

왕위에 대한 공포와 권력이 만든 세계문화유산인 시기리야

by 머슴농부


스리랑카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유적지는 시기리야(Sigiriya)로 일명 사자 바위(Lion Rock)라 부르는 바위 요새로 정교한 고대 기술로 세계적으로 유명한 곳이다.

시리기야는 숙소에서 툭툭이로 약 30~40분가량이 소요되어 전날에 툭툭이를 예약하였다.


숙소에서 제공하는 아침식사를 마친 후 툭툭이를 타고 시기리야에 도착하였다.

시기리야 매표소를 찾아갔는데 입장료가 후들후들하였다.

US$35불로 대략 50,000원 상당으로 너무 비쌌다.

시기리야 입장객의 대부분은 서양 여행객들이었다.

티켓을 스캔하고 입장하여 조금 걸어서 들어가자 시기리야가 보이기 시작하였다.

시기리야는 외부 방어용인 해자가 설치되어 있고 대칭적으로 설계된 정원(Water Gardens)이 있으며 연못과 분수, 채널 등이 있다.

시기리야 정원과 분수는 중력과 수압을 이용한 고대 수리 기술이 적용되었고, 자연 낙차와 채널을 활용하여 물을 이동하며 지하 수로와 석조 배수 시스템이 설계되어 있어서 우기와 건기 모두 안정적인 물 공급이 가능했다고 한다.

연못 바닥에는 작은 구멍들이 있어 압력이 높아지면 자동으로 물줄기가 솟아오르는 분수 기능이 작동하는데 일부는 오늘날에도 작동이 가능하다고 하니 대단한 기술력이다.


시기리야는 공사 기간이 약 7년(477~485년)이고, 수만 명의 노동자와 기술자가 동원되었다고 추정되며 정상까지는 계단 1,200개를 걸어서 올라가야 한다.

시기리야는 거대한 화강암 바위(높이 약 200m)로, 5세기 카샤파 왕(Kasyapa)에 의해 건설되었다.


5세기 중반, 스리랑카를 다스린 다투세나 왕에게는 두 아들이 있었다.


장남 카샤파는 평민 여인에게서, 차남 목갈라나는 왕족 혈통의 여인에게서 얻은 아들이었다.


형 카샤파는 불리한 출생으로 말미암아 동생 목갈라나에게 왕위를 뺏길지 모른다는 불안감을 느끼다 결국 아버지를 살해하고 본인이 왕좌를 차지한다.

왕위에 오른 카샤파는 언젠가 자신의 이복동생인 목갈라나가 군대를 이끌고 쳐들어와 자신을 죽일 수 있다는 공포에 시달리던 카샤파는 수도를 시기리야로 옮기고 정글 속 우뚝 솟아 있는 가장 높은 화강암 바윗덩어리 위에 불가침의 요새이자 궁궐을 지었다.


하지만 결국 동생은 군대를 이끌고 쳐들어왔고, 난공불락의 바위산도 그를 지켜주지 못했으며 카샤파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자신의 권력이 언젠가는 끝날 수 있다는 공포, 자신의 부도덕함과 불법을 단죄당할 수 있다는 공포가 높은 바위 위 사자상이 자신을 지켜줄 것이라는 어처구니없는 판단으로 어쩌면 황당하게 만들어진 건축물은 현재 세계 문화유산이 되었다.

시기리야 정상에 오르려면 중간에 Lion Gate(사자문)를 통과해야 하는데 거대한 사자 발만 남아 있다.

원래는 사자의 머리도 있었다고 한다.

사자의 양발 사이에 만들어진 계단을 오르면 왕궁 정상에 도달할 수 있다.


사자문 앞에서 시기리야를 올려다보니 거의 수직으로 서있는 바위산에 만들어진 철제 계단을 올라가는 사람들을 바라보는 것만도 쉽지 않다.

무릎이 좋지 않고 고소공포증이 있어 올라갈지 말아야 할지를 고민하다 용기 내어 올라가보기로 하였다.


철제로 만들어진 계단은 발을 내딛을 때마다 삐걱 소리가 나기도 하였고 흔들리는 곳도 있어 철제 계단의 안전점검은 제대로 하고 있는지 궁금하였다.

올라가면서 바위산 아래를 바라보면 아찔한 현기증이 느껴졌다.

철제로 만들어진 계단을 맨몸으로 올라가기도 어려운데 약 1500년 전에 왕궁을 세우기 위해 필요한 재료들을 어떻게 운반했을까?

또한 얼마나 많은 희생이 있었을까?


지그재그로 이어진 철제 계단은 거의 90도처럼 느껴질 만큼 급한 경사라 절벽 옆으로 만들어진 난간을 지날 때는 다리가 후들거렸다.


무려 1,200여 개의 계단을 밟은 후에야 정상에 도착했다.


정상에는 이미 많은 사람들이 올라와 있었다.

정상은 생각했던 것보다 규모가 무척 컸다.


정상에는 왕궁 터와 병영, 주거지, 연회장, 수영장과 목욕탕이 있으며, 그리고 워터 가든과 분수가 있었다는 증거가 있다고 한다.


하지만 옛날의 영화는 사라지고 지금은 잔재만이 남아 있다.

시기리야는 거대한 바위를 깎아 계단, 수조, 채널 등을 직접 조성하고 도구는 주로 쇠못, 망치, 끌 등을 사용한 것으로 추정된다고 되어 있다.


또한 건설에 참여한 사람들도 노예가 아닌 숙련된 장인과 숙련공들이 참여하였다고 한다.


정상에는 큰 저수조가 있어 빗물을 저장하고 사용했으며, 바위의 홈과 배수로를 통해 빗물을 모으고 저장했다고 되어있다.


바위 꼭대기에서 바람이 보여주는 건, 무너져 내린 성벽과 기단만 남은 건물터, 계단 따위들이다.

1500년 전 천륜을 거스른 한 왕이 거대한 화강암 바위 꼭대기에 자신을 스스로 가두고 11년 동안을 살았다.


정상 주변에는 아무런 장애물이 없기에 360도 파노라마로 풍경을 감상할 수 있다.

정상에서 한동안 머물다 내려오는데 역시나 다리가 후들거렸다.


사자문에 도착하여 휴식을 취하며 시기리야를 올려다보니 까마득하였고 다시는 못 올라갈 것 같다.

내려가는 길은 올라올 때와는 다른 길이었다.


얼마를 걸어서 내려가자 원형 수직 계단이 나와서 올라갔다.

이곳은 “시기리야 미녀들”이라 부르는 프레스코화 여신 벽화가 그려져 있는 곳인데 사진촬영을 철저하게 금지시키고 있었다.


벽화를 보고서 천천히 걸어서 내려왔다.


주차장에서 기다리고 있던 툭툭이 기사를 만났다.


툭툭이 기사가 시기리야를 다른 각도에서 볼 수 있는 뷰 포인트로 데려가 주었다.

시기리야는 권력에 눈이 멀어 찬탈한 왕위를 계속 지키고자 탐욕에 눈이 멀고 민심을 거스르고 공정과 상식을 파괴하며 나라를 지배하려 했던 어리석은 인간들의 욕망이 부질없음을 보여주는 역사적이자 교훈적인 유적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시기리야 역사가 주는 교훈을 잘 새겨야 할 사람들이 점점 늘어나는 대한민국이다.

시기리야에서 나와 툭툭이 기사가 입장료가 있지만 아름다운 사원이 있는데 가볼 의향이 있느냐 묻기에 좋다고 하여 가보았다.


이곳 사원도 콜롬보에서 방문하였던 사원처럼 왠지 무질서하고 정리가 안되어 있어 보였고 곳곳에 공사하는 흔적이 보였다.


부처상 뒤에는 킹 코브라가 입을 벌리고 있는데 마침 서양인 여행객과 같이 온 현지 가이드에게 물어보니 부처님이 명상에 들었을 때 갑자기 폭우가 내리자 킹 코브라가 입을 벌리고 우산이 되어 비를 맞지 않게 하였다는 전설을 형상화하였다고 하였다.

부처의 고행상(苦行像)도 있었다.

하지만 전체적으로 왠지 산만한 분위기의 사원이었다.


사원에서 내려오자 매표소에서 차 한잔과 과자를 주었다.

이곳 사원은 툭툭기사들이 여행객을 데려오면 약간의 커미션을 받는 사원이라는 느낌을 받았다.


시기리야를 올라가고 내려오느라 체력이 많이 소모된 탓인지 시기리야 자체에 큰 감흥은 없었고, 오히려 전날 방문했던 석굴사원이 더 좋았다는 느낌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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