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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0년의 시간이 깃든 담블라 석굴사원

세계문화유산인 스리랑카 담블라 석굴사원(Cave Rock Temple)

by 머슴농부


스리랑카를 떠올리면 가장 먼저 생각나는 곳은 단연 ‘사자 바위’라 불리는 “시기리야(Sigiriya)”다.


콜롬보에서 하룻밤을 묵은 후, 시기리야로 가기 위해 담불라(Dambulla)로 향했다.


스리랑카에는 에어컨이 없는 일반 시내버스와, 에어컨이 달린 미니버스가 있다.


가격 차이는 컸지만, 더운 날씨 탓에 망설임 없이 미니버스를 선택했다.

콜롬보에서 약 네 시간을 달려 담불라에 도착했다.

담블라 숙소는 깊이 살펴보지 않고 그저 괜찮아 보이는 홈스테이를 선택했는데, 시내에서 제법 떨어진 외진 곳이었다.


주변에는 식당도, 가게도 거의 없어 약간의 불편함이 있었지만, 툭툭이를 타고 도착한 그 숙소에는 여행자의 고단함을 달래줄 조용한 평화가 있었다.

잠시 쉰 뒤 주변을 검색하니, 담불라에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석굴사원(Cave Rock Temple)과 황금사원(Golden Temple)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숙소에서 잠시 더위를 식힌 후 천천히 걸어 사원 입구로 향했다.

입구에는 반갑게도 한글로 된 환영 문구가 걸려 있었다.

기원전 3세기, 인도의 아쇼카 대왕은 불교를 국교로 삼고 불법을 주변국으로 전파하기 시작했다.


그는 자신의 아들 마힌다를 스리랑카로 보내 불교를 전하도록 했고, 당시 스리랑카의 데와남피야 티싸(Dewanampiya Tissa) 왕은 아누라다푸라 근처에서 사슴을 사냥하다 마힌다 대사를 처음 만났다고 전해진다.


그 극적인 만남이 바로 스리랑카 불교의 시작이었다.

이후 스리랑카의 불교는 인도보다도 더 순수한 형태로 전승되었고, 오늘날 미얀마·태국·라오스·캄보디아 등 동남아시아 불교의 뿌리가 되었다.


기원전 1세기, 남인도의 침략으로 왕위를 잃은 발라감바(Valagamba) 왕은 도망자 신세가 되어 숨어 지내야 했다.

그가 피신한 곳이 바로 이 담불라의 동굴이었다.


15년 뒤 왕위에 복귀한 그는 자신을 품어준 동굴에 대한 감사의 뜻으로 사원을 조성했다.

그 후 여러 왕과 후원자들에 의해 확장된 사원은 총 다섯 개의 석굴로 이루어져 있으며, 그 안에는 150개가 넘는 불상이 모셔져 있다.


그중에서도 가장 인상적인 것은 길이 14미터의 열반 부처상이다.

세상은 늘 소란스러운데, 누워 계신 부처님의 얼굴은 그 모든 번뇌를 초월한 듯 한없이 평온했다.


석굴 내부는 2,200년 전부터 20세기 초까지 이어진 벽화와 불상으로 가득 차 있다.

습기와 어둠 속에서도 보존 상태가 놀라울 만큼 훌륭하다.


천장과 벽에는 부처님의 생애, 제자들의 모습, 그리고 연꽃과 만다라 문양이 쉼 없이 이어져 있었다.

희미한 조명 아래에서 바라본 그 벽화들은 마치 시간의 틈 사이로 과거를 들여다보는 창 같았다.


이토록 오래된 것을 인간의 손으로 지켜내고, 그 뜻을 오늘까지 전해오고 있다는 사실이 경외심을 자아냈다.

이곳은 단순한 관광지가 아니라, 지금도 살아 숨 쉬는 스리랑카 불교 신앙의 성소였다.


참고로 석굴사원 입장 시 입장료가 있으며, 긴 바지를 착용해야 하고 신발은 입구에 맡긴 뒤 맨발로 관람해야 한다.


석굴사원에서 내려오면서 목이 말라 야자수를 사서 마셨다.

길가에는 야생 원숭이들이 여행자들의 시선을 끌었다.

길의 끝에는 금빛으로 빛나는 황금사원(Golden Temple)이 자리하고 있었다.


이곳은 비교적 최근에 지어진 현대식 사원이지만, 지붕 위에 우뚝 선 30미터 높이의 거대한 황금 부처상이 눈길을 끌었다.

443년간의 식민 지배 동안 유럽 열강들은 가톨릭을 전파했지만, 지금도 스리랑카 인구의 약 69%가 불교 신자라 한다.


그만큼 불교는 여전히 이 땅의 정신이자, 사람들의 삶 속에 깊이 뿌리내려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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