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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라 Dora Dec 18. 2022

그 날 하고 싶은 것을 하며 보내는 하루

그리고 한치 앞을 모르는 인생

토요일 아침 스르륵 눈을 떠서 머리 맡에 둔 휴대폰 액정의 시간을 확인한다. 오전 10시 정도다. 나인투식스의 삶이 완전히 바뀌었는데도 여전히 일찍 일어나는 것이 싫어서 늘 오늘은 얼마나 늦게 일어났는지 확인을 하는 것이 습관이 됐다. 10시를 기준으로 10시보다 훨씬 늦어지면 성공한 것이었고 8시나 9시쯤 일어나면 아 너무 일찍 일어났네 싶었다. 하여튼, 토요일에 눈을 뜨니 10시였다. 사실 전날 그리 늦게 잔 것도 아니었기에 아 적당하네 싶었다.


출근시간이 바뀌며 좋은 점 중 가장 큰 것은 일어날 때 알람시계에 의지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 얼마든지 늑장을 부려도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둘째로는 출근 전까지 시간이 여유가 있다면 어디든 갈 수 있고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폭닥폭닥한 겨울 이불 속에서 한참을 뒤척거리다가 동백꽃이 머리에 번쩍 떠올랐다. 지난 화요일부터 목요일까지 제주도에 다녀왔는데, 8천원이라는 거금을 내고 서귀포 위미리에 있는 동백수목원에 다녀왔다. 불만족스러웠던 것은 아니지만 요금이 생각보다 비쌌다. 동백군락지라 동백향도 맘껏 맡을 수 있고 사방팔방 둘러봐도 동백꽃, 그리고 간간히 야자수가 시야를 가득 메운다는 점은 만족스러웠으나 부산에서는 공짜로 동백꽃을 맘껏 볼 수 있는 곳이 있다는 게 떠오른 것이었다.


해운대 근처의 동백섬에 가기로 맘먹었다. 집 보러 왔을 때 비가 와서 못 갔고, 이사한 후 엄마랑 산책할 겸 갔었지만 그땐 동백꽃이 거의 없었다. 그래서 이번엔 꼭 동백섬에서 동백을 봐야겠단 생각이었다. 일단 꽤 멀리 가는 김에 그 쪽에 있는 안 가본 곳에 다 가봐야겠단 생각이 들었다. 센텀시티도 가보고 동백섬도 가보고. 일단 센텀시티부터 가볼까 싶었다. 센텀시티는 왠지 부자들이 많이 갈 것 같으니까 안 하던 화장도 했다. 그리고 회사 출근할 때나 입었던 슬랙스에, 핸드메이드 코트에… 이래저래 나름대로 꾸미고 집을 나섰다.


준비를 하자마자 나가서 2호선을 탔다. 일단 센텀시티가 가까우니까 센텀시티부터 가려고 했다. 그리고 앉아서 이경미 감독의 수필집 <잘돼가?무엇이든>을 읽으며 몇 정거장을 보냈다. 부산으로 이사하고 나서는 지하철에서 웬만하면 이어폰을 꼽지 않는다. 사람들이 부산사투리로 이야기하는 걸 듣는게 좋은 것도 있고 그냥 이런저런 소음이 좋아서였다. 그런데도 책에 집중한 나머지 센텀시티역을 지나쳐버렸다. 이렇게 된 마당에 일단 동백섬부터 가기로 했다. 날은 흐린듯 맑았다. 다행히 춥지가 않았다. 한번 와봤다고 지도를 보지 않아도 동백섬까지 갈 수 있었다. (길이 쉽기도 했다) 동백섬 순환코스를 따라서 한바퀴 돌고 동백나무 앞에서 동백꽃 사진도 찍고 바다를 배경으로도 찍고 셀카도 찍고 센텀시티로 향했다. 이번엔 지하철 대신 버스를 탔다. 지하철역이 가까우니 자꾸 지하철을 타게 되는데 사실 난 버스를 더 선호하는 편이었다. 똑같이 30분이 걸려도 버스는 더 짧게 느껴졌다. 시시각각 바뀌는 창밖의 풍경을 보는 게 좋았다. 


센텀시티 신세계백화점 앞에 도착했다. 창밖의 풍경을 보려고 버스를 탔건만 버스에서도 책을 보느라 창밖의 풍경은 보지 못했다. 그래도 다행히 이번엔 정거장을 놓치지 않고 내렸다. 신세계백화점 안을 슥 훑고 신세계몰까지 가서 구경을 했다. 과연 부산에서 가장 크다던 백화점답게 엄청 컸고 각종 브랜드도 많이 모여있었다. 눈이 돌아갔다. 하지만 통장잔고를 생각하며 이성을 붙잡았다. 그러니 아이쇼핑도 슬슬 지루해졌다. 그래서 금방 백화점에서 나왔다. 다시 2호선을 타고 집으로 돌아갔다. 주말 출근은 오후 다섯시라서 시간이 조금 남았다. 밥을 차려먹고 읽던 책을 끝내고 나니 출근 시간이 되었다. 


출근하자마자 오픈런을 한 손님들이 있어서 정신없이 일이 휘몰아쳤다. 미친듯이 요리를 하고 잠깐 쉬는 텀이 있고 또 한번 손님들이 우르르 빠져나가고 또 다시 손님들이 몰리고 또 빠져나가고 그러고 나면 휴게시간 30분이 주어진다. 30분동안 나는 5분거리의 집에 다녀온다. 보통 밥을 먹을 때도 있고 대충 간식을 먹을 때도 있는데 그 날은 친구 김렛(가게 사장이다)과 전부터 가고 싶었던 오뎅바에 가기로 했어서 밥은 먹지 않고 그냥 쉬다가 다시 가게로 갔다.


손님이 그렇게 많더니 밤 11시가 되니 거짓말처럼 썰물처럼 다 빠져나갔다. 김렛과 나와 거기서 추가멤버가 된 다른 직원인 하이볼까지, 신나게 마감을 하고 오뎅바로 달려갔다. 그러나 오뎅바는 꽉 차있었고 우리는 울적한 얼굴로 웨이팅 리스트에 이름을 적고 나와 터덜터덜 “어떡하지?”를 중얼거리며 골목을 배회했다. 그때 오뎅바에서 직원이 뛰어나왔다. 좁은 자리가 하나 남긴 한데, 정말 좁은데 거기라도 괜찮냐는 것이었다. 우리는 세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각자 청하 1병과 안주 하나를 조지자!고 다짐하고 왔지만 한 병은 두 병이 됐고 안주도 동났다. 먼저 오뎅바에 가자고 제안했던 김렛은 도무지 배부르다고 먼저 자리를 뜨겠다고 쿨하게 계산을 하고 떠났다. 나와 하이볼은 미련이 남았다. 우리는 김렛이 추가로 주문한 뒤 떠나버려서 남게 된 청하 한 병을 나눠마셨다. 각자 청하를 총 두 병 반을 마신 거다. 그리고서 눈을 빛내며 2차로 다른 바를 가자고 했다. 전부터 가고 싶었던 바가 있었는데 위치도 잘 모르겠고 같이 갈 사람도 없어서 못 가고 있던 덴데, 하이볼이 거기 단골이라고 해서 우리는 신나게 뛰어갔다. 참고로 하이볼은 나보다 11살이나 어린데 이상하게 말이 잘 통하고 친구같다. (그친구도 그렇게 생각할진 모르겠는데 일단 그렇다고 말은 해준다. 경로우대인지는 모르겠다)


우리는 거기서 칵테일을 각자 한 잔씩 마셨다. 하이볼의 집이 멀어서 우리 집에서 자고 같이 출근하기로 했다. 그래서 우리 집으로 다시 거슬러 가는 길에 편의점에 들러 맥주 네 캔을 사서 들어갔다. 도무지 끝을 몰랐다. 우린 정말 비슷하다니까.(아니면 미안)


집에 들어와서 우리는 편한 옷으로 갈아입고 맥주를 따라 마셨다. 찬장에 쳐박혀 있던 과자도 꺼내 먹으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다. 영화 이야기를 하고 음악 이야기도 했다. 내가 좋아하는 이경미 감독의 영화 <미쓰홍당무> 이야기를 하다가 내친 김에 넷플릭스에서 영화를 찾아 봤다. 깔깔 웃으며 영화를 보고, 사실 내 꿈은 영화감독이었다는 이야기를 했더니 하이볼은 영화감독이 되려면 연기도 잘 해야한다고 이야기했다. “그래? 나 각본집 있는데 연기 한 번 해볼까?” 하고 나는 집 어디엔가 처박혀있던 <헤어질 결심> 각본집을 후다닥 가져왔다. 어두운 불빛에 의지해 각본집을 훑어봤다. “언니 우리 아무데나 펼쳐서 나오는 데 연기해 봐요!” 하이볼이 말했다. 그에 따라 나는 아무데나 펼쳐서 나오는 부분을 연기했다. 하이볼은 그것을 카메라로 녹화했다. 취중 연기를 번갈아가면서 하다가, 감독이 되려면 그림도 잘 그려야하고 글도 잘 써야한다며 갑자기 하이볼은 일기장을 꺼냈다.(그는 Z세대답지 않게 늘 일기장을 가지고 다니면서 가끔 글을 끄적였다) 나도 책상에 굴러다니던 일기장을 가지고 왔다. 음악을 틀어놓고 글을 썼다. 하이볼은 뭐라고 빼곡히 글을 썼다. 나도 지기 싫어서 펜을 열심히 굴렸다. 그런데 알콜에 절여진 뇌는 글을 뱉어내기를 거부했다. 끄적끄적 의미없는 낙서와 단어의 나열, 그것이 끝이었다. 너무 피곤했다. 시계를 보니 벌써 새벽6시가 넘어서 일단 잠이나 자자고 했다.


다시 눈을 떴을 땐 오후 한 시였고 하이볼은 언제인지 모르겠지만 하여튼 떠나고 없었다. 그를 위해 꺼내줬던 이불은 정갈하게 개어두고, 재밌게 잘 놀았다고 집에 들렀다가 출근하겠다고 이따 보잔 메시지를 남겨놨다. 지독한 숙취에 나는 네시까지 누워있다가 샤워를 하고 출근을 했다. 두 번 속을 비웠다. 이런 지독한 숙취는 오랜만이었다. 출근해서도 속이 울렁거렸다. 진짜 이제 술을 먹지 말아야겠다고 다짐 또 다짐했다.(그 다짐은 일주일 전에도 했으나…)


부산에 온 이후로 나는 현재 하고 싶은 것에 집중하고 있다. 다음 일은 생각하지 않고 내일 뭐 할지도 생각하지 않고 그날그날 눈을 뜨면 당장에 뭘 하고 싶은지만 생각하며 사는 중이다. 아무것도 안 하고 싶은 날은 아무것도 안 했고 운동을 하고 싶으면 운동을 몇 시간씩 했고 갑자기 산에 가고 싶으면 벌떡 일어나서 등산복을 허둥지둥 주워입고 산에 갔다. 당장 뭐 할지에 대한 생각만 하고 있고 미래에 뭐 할지는 생각을 하지 않고 있으니 문득문득 나 이러다가 어떻게 되는 거지? 하는 두려움이 고개를 든다. 그럴 때마다 잠깐 미래에 대해 생각하다가 이내 접어버렸다. 


진짜 끝장나게 성공하고, 돈 엄청 잘 벌고, 간지나게 살고 싶은데 또 어느날은 아무것도 안 하고 싶었다. 꼭 성공이라는 걸 해야 하나? 그냥 이렇게 소소하게 하루하루 하고 싶은 걸 하면서 살면 안되나 하는 생각이 든다. 매순간 이 두 생각이 교차한다. 이 두 생각이 교차하면 나는 숨는다. 책으로 숨고, 운동으로, 산으로, 그냥 어디로든지 숨는다. 유예할 수 있을 때까지 미래를 유예하고 싶다. 아직 그래도 되니까. 


얼마 전 친구 라프로익과 집에서 술을 홀짝이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그에게 물은 적이 있다. 라프로익, 그리고 앞서 말한 친구이자 사장인 김렛 이 두명은 동업자로 벌써 가게를 몇 개씩 가지고 있는 성공한 자영업자인데, 아무래도 늘 궁금한 질문이었다. “너의 꿈은 뭐야? 결국 뭘 하고 싶어?” 그랬더니 라프로익은 커다란 눈을 천천히 깜빡이며 “그런 건 없고 난 그냥 지금 하고 싶은 걸 열심히 하고 있어"라고 대답했다. 물론 이 친구는 나보다 여섯 살이나 어리며 앞자리가 다르다. 20대에는 그래도 된다. 나도 그랬다. 그런데 30대인 내가 그래도 될까? 하는 불안감이 또 고개를 들려고 한다. 모르겠다. 나도 지금 하고 싶은 걸 하고 있긴 한데, 열심히 하고 있는 건지는 잘 모르겠다. 사실 당장 몇 개월 후의 일도 모르겠는걸. 일단 1년은 부산의 이 칵테일바에서 일을 하기로 마음을 먹었긴 하지만, 부산이 좋아서 1년 더 있고 싶다가도 또 일이 지겨워지면 그 전에 훌쩍 뜨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고. 에라 모르겠다. 당장 하고 싶은 건 알지만 앞으로 뭘 하고 싶은지는 모르겠다. 


한치 앞밖에 모른다고 뭐라고 해도, 아직 어쩔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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