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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즐겨찾기 Jan 21. 2019

장바구니 물가에 위로 받다

독일의 저렴한 마트 물가가 삶의 질을 높인다

 타는 듯한 더위가 한창이던 8월의 어느 날 나와 가족들은 비자 인터뷰를 위해 외국인청에 갔다. 독일에 오기 전 받은 유효기간 1년의 비자를 연장하기 위함이었다. 외국인청은 중앙역 바로 뒤에 있는 건물이어서 많은 여행자들과 행인, 역 주변에 으레 있는 부랑자와 경찰관들로 혼잡했다.  

    

 우리의 예약 시간은 12시였으나, 예약이 밀려있어서 한참을 기다려야만 했다. 열기가 가득한 건물 내부의 공기는 답답하고 무거웠다. 이 지역의 건물들이 으레 그러하듯 냉방장치라고는 에어컨은 물론 선풍기조차 없었다. 목이 말랐으나 물을 마실 수 있는 정수기가 없었고, 대기실이 있는 2층에는 방문객용 화장실조차 없었다.      


 1시간을 기다린 끝에 인터뷰를 시작할 수 있었다. 면접 보는 취준생의 심정으로 담당공무원의 책상 앞에 앉았다. 1년 전과는 달라진 신분으로 인해 비자를 연장 받지 못할 수도 있다는 생각에 불안했다.      


 담당자는 내가 제출한 서류들을 훑어보면서 한두 가지 질문을 했다. 담당자가 옆에 있는 복사기를 이용해 서류들을 복사하는 것을 보니 별 문제없이 절차가 진행되는 것 같았다. 하지만 역시나 올 것이 왔다. 예상한 대로 재정증명에 관한 서류가 문제였다. 담당자는 서류의 미비점을 지적한 후 비자 연장을 해줄 수 없다고 말했다. 어떻게 해야 되느냐고 되물었지만 자신이 그걸 설명할 수는 없다고 했다. 3개월의 기간을 줄 테니 그때까지 서류를 보완하라고 대답할 뿐이었다.     


 우리는 돌아오는 길에 마트에 들렸다. 레드 와인 1병(2.19유로), 양파 1kg(1유로), 모짜렐라 치즈 1봉지(1유로), 검은 올리브 300ml, 1통(1유로), (각종 야채를 씻어서 썰어 놓은) 샐러드 재료 200g(79센트), 우유 1L(1유로), 스테이크용 소고기 등심 400g(7유로)를 샀다. 점심으로 양파 수프, 올리브를 넣은 샐러드와 스테이크를 먹었다. 한결 기운이 나고 마음이 편안해졌다.     

1유로 전후인 우유값


 2개월 후인 10월 중순 다시 외국인청을 첮았다. 새로운 비자 인터뷰 일정을 잡기 위해서였다. 인터넷으로 인터뷰를 잡는 것도 가능하지만, 무작위로 날짜와 시간이 정해지기 때문에 참석 가능한 시간으로 잡기 위해서는 직접 방문하는 것이 더 나았다. 초가을임에도 낮은 온도에 바람이 강하게 불고 가랑비가 흩날리는 쌀쌀한 날이었다.      


 인터뷰 예약은 외국인청의 별관 1층에서 진행되었는데, 대기자가 많아서 바깥으로 길게 줄이 늘어서 있었다. 터키인들로 보이는 아랍계 사람들이 가장 많았고, 동유럽에서 온 듯한 사람들도 제법 있었다. 인도인, 중국인, 일본인 같은 사람들도 몇 명 보였다.     


 사무실로 들어간 신청인들이 업무를 끝마치고 나가면 바깥의 대기자들 중 4-5명씩 입장했다. 독일의 행정절차는 빠른 편이 아닌데다가 내 앞에 30명 정도 서 있었으므로 대기시간이 길어졌다. 싸늘한 바람에 코트 옷깃을 세우고 주머니 깊숙이 손을 넣었다. 가을비가 처량하게 흩날리고 있었다. 갑자기 찾아 온 습한 냉기에 몸이 시려왔다. 그곳에 줄 서 있는 것이 왠지 서글퍼졌다.

외국인청 밖에 줄 서 있는 사람들

 한 시간을 기다린 후 사무실에 입장을 했으나, 사무실 안의 대기줄 역시 길었다. 우리는 얼른 빈자리를 찾아 이민자들과 난민들의 틈바구니에 끼여 앉았다. 한 시간을 더 기다린 후에야 비로소 담당자를 만날 수 있었다.      


 담당자는 머리에 히잡을 두르고 있는 아랍계 여인이었다. 이민과 난민 신청이 많은 아랍인들을 위해 고용된 듯 보였는데, 독일어는 잘 하지만 영어는 익숙하지 않아 의사소통에 어려움이 있었다. 행정절차를 처리하는 데도 익숙하지 않은 듯 시간이 오래 걸렸으나, 친절하게 다음 인터뷰 일정을 잡아준 것은 다행이었다.     


 돌아오는 길에 마트에 들러 감자 2.5kg(1유로), 토마토 1kg(1유로), 당근 1kg(1유로), 소세지 500g(3유로), 계란 10개(1유로), 고다치즈 400g(2유로), (토막으로 잘라진) 닭고기 1.1kg(4유로), 돼지 목살 500g(4유로), 화이트 와인 1병(3유로)을 샀다. 점심으로 치즈를 얹은 토마토 수프와 소세지 야채 볶음, 삼계탕을 먹었다. 차가웠던 몸과 마음이 조금 따뜻해졌다. 음식은 마음까지 따뜻하게 한다.


 독일에서 사는 것이 언어의 장벽과 불안정한 지위로 인해 어렵고 힘든 가운데 만족과 위안이 되는 것 중 하나가 저렴한 마트 물가다. 장바구니가 무겁게 느껴질 정도의 물건들을 사도 10유로 안팎이고 고기류와 같이 상대적으로 비싼 품목을 몇 개 사는 경우에도 20유로면 충분하다. 정확히 계산해 보지는 않았지만 아무리 많이 잡아도 일주일 식비가 100유로를 넘지 않을 것이다. 기댈 곳 없는 외국 생활에 몸과 마음이 지칠 때면 값싸고 훌륭한 재료로 만들어진, 한국에 돌아가서는 즐겨 먹기 어려운 음식들을먹으며 위안을 얻는다.     

   

 많은 이민자들과 난민들이 독일을 찾는 이유 중의 하나는 아마 비교적 저렴한 장바구니 물가 때문일 것이다. 최소한의 벌이만 된다면 마트에서 원하는 재료를 얼마든지 구할 수 있어서 기본적인 삶의 질을 높일 수 있다. 다른 비용은 몰라도 먹고 사는 비용을 줄일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적지 않은 월세를 지급해야 하지만 넓은 집이 아니라면 생각만큼 월세가 많이 들지는 않고, 다달이 내야하는 월세는 목돈을 한꺼번에 지급해야 하는 매매나 전세보다 부담이 적은 면이 있다. 재산을 축적하지는 못하더라도 빚에 쪼들리지 않으면서 상대적으로 풍족한 삶을 누릴 수 있다.     


 독일 사회 역시 빈부 격차가 없지 않고 사회적 변동성은 매우 약하다. 사회가 안정되었다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그만큼 신분과 계층의 이동이 어렵다. 잘 사는 사람은 계속 잘 살고 못 사는 사람은 계속 못 살 가능성이 높다. 독일에도 다른 사회와 마찬가지로 부자들이 사는 동네가 있고 의사나 교수 같은 전문직은 사회적 명예와 부를 누린다.      


 그럼에도 독일인들의 행복지수와 사회에 대한 만족도가 높은 것은 여러 가지 사회 안전망이나 짧은 노동시간과 더불어 저렴한 장바구니 물가가 하나의 이유일 것이다. 신분 상승과 부의 축적을 꿈꾸지 않더라도(이를 위해서는 그만큼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므로 이를 굳이 감수하려는 사람은 상대적으로 적다) 충분히 여유롭고 만족스러운 생활을 할 수 있다. 사회적 변동성이 크지 않다는 것은 남들과 비교할 필요가 적어진다는 점에서는 역설적으로 행복도를 높이는 요인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몇 해 전 어떤 교수가 SNS에 “모두가 (개천에서) 용이 될 수 없으며, 또한 그럴 필요도 없다. 더 중요한 것은 .... 개천에서 붕어, 개구리, 가재로 살아도 행복한 세상을 만드는 것이다.”라는 말을 했다가 사회적으로 비난받은 일이 있었다. 또 다른 고위 공무원은 “모든 사람이 강남에 살 필요는 없다. 내가 강남 살아봐서 안다.”라고 말해서 지탄이 대상이 되기도 했다.     


 나는 그 교수와 공무원의 말에 동의하는 편이다. 그들이 어떤 의미로 그런 이야기를 했는지 이해한다. 그들에 대한 무조건적인 비난과 지탄은 지나친 측면이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들의 말에 개인적으로 동의하는지와 별개로, 그러한 세상이 되기 위해서는 어떤 조건들이 선행되어야 하는지 고민해 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고국에서는 물가가 너무 올라 삶이 팍팍하다는 얘기가 끊이없이 들려 온다. 대충 계산해 보니 한국에 돌아갔을 때 월세는 비슷하게 드는데, 생활비는 두 배 이상 나갈 것 같다. 게다가 아이들 교육비도 만만치 않게 들 것이다. 물가를 결정하는 데는 많은 요인이 있고 한 두 가지 부분의 물가만을 비교하는 건 옳지 않지만 도대체 무슨 차이가 있어선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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