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적 차이는 다른 문화에 대한 편견과 고정관념을 낳는다.
유럽 여러 나라를 자동차로 다니다 보면 각 나라에 따라 달라지는 운전문화와 도로 사정을 경험할 수 있다. 나의 개인적인 경험에 국한된 것이고 그러한 경험조차 편견과 고정관념에 의한 것이지만, 부정할 수 없는 어떤 경향성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내가 살고 있는 독일은 흔히 예상하듯이 교통규칙을 잘 지키고 양보를 잘한다. 제한속도를 잘 지키고 실선에서 절대 차선을 변경하지 않는다. 깜빡이를 켜면 옆 차선의 차량이 속도를 늦춰준다. 비보호 교차로나 좁은 골목길에서 차량이 마주쳤을 때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 양보한다. 고속도로의 차량들은 차선에 맞는 속도로 원활하게 달린다. 1차선은 추월 차선이기 때문에 가장 빨리 달리고, 화물차들은 가장 느린 오른쪽의 차선을 벗어나지 않고 순서를 지켜 달린다. 다른 나라의 고속도로에서 볼 수 있는, 화물차들끼리 서로 추월하느라 애쓰는 모습은 거의 볼 수 없다.
하지만 제한속도가 없는 고속도로에서는 정말 미친 듯한 속도로 달리는 차들이 많다(속도를 즐길 수 있는 도로가 많다). 마치 그동안 쌓였던 질주 본능이나 광기를 폭발시키는 것 같다. 아니면 고급 자동차의 성능을 시험하거나. 무제한 고속도로의 1차선을 달리다 보면 광폭 질주하면서 뒤쫓아오는 차량의 시선과 압력을 감당해야 될 때가 있다.
그런 일이 거의 없긴 하지만, 누군가 교차로에서 꼬리를 물면 무안할 정도로 경적을 울리며 항의한다. 상대방이 규칙을 지키지 않는다고 생각하면, 어떻게 해서든 “네가 규칙을 어겼어”라는 의사를 표시하려고 한다. 그런데 자신이 교통규칙을 어긴 경우에는 “어쩔 수 없었어.”라는 듯 행동한다. 독일 사람들은 규칙을 잘 지키지만, 다른 사람의 잘못은 거침없이 지적하고 자신의 잘못은 쉽게 인정하지 않는다. 어쨌든 독일은 규칙을 잘 지키기만 한다면 운전하기 가장 편한 나라이다.
독일 다음으로 많은 시간을 운전해본 곳은 네덜란드다. 국토가 좁은 네덜란드는 도로가 넓지 않은데 비해 차량이 많다. 그래서인지 네덜란드로 진입하면 차량들이 다닥다닥 붙어서 달리는 게 느껴진다. 차량 사이에 다른 차가 들어올 수 없을 정도로 앞차 뒤에 붙는다. 만약 앞차와의 간격이 벌어지면 다른 차가 그 사이로 끼어든다. 그렇게 해서 차량들이 일정한 간격과 속도로 열을 맞추어 달린다. 수많은 차들이 길게 이어져 같은 속도와 간격으로 달리는 모습은 신기할 정도다.
뿐만 아니라 네덜란드에서는 2차선이 비어 있는 경우 1차선으로 달리지 않는 것이 암묵적인 룰이다. 다시 말해, 차량이 많지 않으면 앞차를 추월하지 않는 한 1차선을 텅 비워놓고 2차선에서 달린다. 한 때 네덜란드에서 살았고 현재 네덜란드에서 일하고 있는 동서의 말에 따르면 네덜란드 사람들은 그렇게 하는 것이 공간을 효율적으로 사용하는 방법이라고 믿는다는 것이다.
공간에 관한 네덜란드식 운전 습관 때문에 유럽의 어느 곳을 가든지 네덜란드 차량은 쉽게 알 수 있다. 게다가 네덜란드의 번호판은 노란색이라서 눈에 잘 띈다. 앞차와의 간격이 그리 넓지 않음에도 끼어드는 차량을 보면 나는 번호판도 보지 않고 말한다.
"또 네덜란드 차가 끼어들었군."
또 다른 재밌는 특징이 있는 나라는 프랑스다. 이것 역시 우리의 선입견과 무관하지 않다. 프랑스 운전자들은 정말 관용 정신이 뛰어나다. 그들은 교통 규칙을 잘 지키지 않지만, 다른 사람의 규칙 위반에 대해 그다지 항의하지 않는다. 규칙을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규칙을 위반할 수 있는 특수한 상황을 폭넓게 인정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신호가 빨간불에서 녹색불로 바뀌었는데 앞차가 출발하지 않고 있어도 웬만하면 경적을 울리지 않는다(이런 경우 독일 사람들은 잘 참지 않는다). 일방통행로의 자동차가 멈춰 서서 옆에 걸어가던 행인(오랜만에 우연히 마주친 지인으로 보였다)과 이야기를 해도 뒤차들은 가만히 기다린다. 규칙을 어길 만한 사정이 있음을 받아들이는 것이고, 자신도 언제든지 그런 상황에 처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사려 깊은 문화이지만 때로는 답답하고 무질서할 때가 있다. 프랑스 시내에는 다른 어느 나라보다 회전 교차로가 많다. 신호등으로 표상되는 ‘규칙’에 따르는 것이 아니라 그때그때의 상황에 맞게 ‘양보’하면서 통행하라는 것이다. 하지만 어떤 곳에서는 차들이 제대로 통제되지 않고 뒤엉켜서 원활하게 통행하지 못한다. 그럴 때면 차라리 신호등이 있는 게 낫겠다고 느낀다.
프랑스의 운전문화와 관련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언젠가 파리 시내를 걷다가 놀라운 장면을 목격했다. 신호등이 있는 사거리에서 가벼운 접촉사고가 났다. 중년의 남성이 운전하는 차가 좌회전 중에 노년의 여성이 운전하는 차를 살짝 추돌한 것이다. 두 사람은 교통의 흐름에 방해가 되지 않게 최대한 중앙선 부근으로 차량을 이동한 다음 차에서 내렸다. 둘은 잠시 얘기를 나누더니 남성 운전자가 지갑을 꺼내어 여성 운전자에게 돈을 주었다. 정확히 보지는 못했지만 50유로짜리 몇 장을 주는 것 같았다. 그 후 두 사람은 곧바로 차를 몰고 각자의 길을 갔다.
놀라운 점은 이 모든 상황이 내가 횡단보도를 건너는 약 30초 동안 일어났다는 것이다. 이런 장면은 독일에서는 물론이고 어느 곳에서도 본 적이 없다. 이것은 각자가 자신의 과실을 인정하고, 상대방에게 양보해야지만 가능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것이 프랑스의 보편적인 운전문화라고 일반화하기는 어렵겠지만, 상대방의 입장을 너그럽게 이해하는 마음과 무관하지는 않을 것이다.
내가 이탈리아에서 운전하고 있음을 느낄 수 있는 특징은 차들이 앞지르기를 할 때 깜빡이를 켜지 않는다는 것이다. 물론 깜빡이를 켜지 않아도 차선을 변경할 수 있을 정도로 앞서 있는 상황이긴 하다. 그럼에도 깜빡이를 켜지 않고 불쑥 들어오는 것에 놀랄 때가 있다. 이탈리아 운전자들은 충분히 앞서 있는 경우 지시등을 켤 필요나 의무가 없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또, 이탈리아는 국도나 지방도가 다른 유럽 나라들만큼 잘 정비되어 있지 않아서 고속도로에서 조금만 벗어나면 왕복 2차로의 도로가 많은데, 그런 길을 제한 속도(시속 70 혹은 50)로 주행하고 있으면 뒤차들이 위협하듯 바짝 다가오고, 빨리 가지 않으면 추월한다. 심지어 추월이 금지된 실선 구간임에도 그렇게 한다. 뭔가 우리나라와 비슷한 느낌이 드는가? 실제로 그렇다.
유럽의 나라들을 다니면서 한국의 명절 때와 유사한 교통체증을 경험해 본 곳 또한 이탈리아가 유일하다. 그것은 고속도로의 분포와 톨게이트 구조 같은 시스템의 차이가 원인일 수 있다. 이탈리아의 고속도로는 독일이나 프랑스와 달리 넓게 퍼져 있지 않고, 톨게이트 창구의 수가 프랑스에 비해 적다(네덜란드, 독일, 벨기에는 아예 톨게이트가 없다. 즉, 고속도로 이용료를 내지 않는다). 이런 요소들이 고속도로의 정체에 악영향을 미친다. 하지만 보다 중요한 원인은 같은 시기에, 같은 곳으로 가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이 아닐까 싶다. 이탈리아에서는 휴가기간이 되면 우르르 한 곳으로 몰려간다. 게다가 곳곳마다 교통사고가 나서 정체되어 있다. 사고 원인을 알 수는 없지만 무리한 차선 변경이 가장 큰 이유 중 하나일 것 같다. 그러니 차가 막히지 않을 수 없다. 그럴 때면 생각한다.
"아, 역시 이탈리아는 어쩔 수 없어."
벨기에는 네덜란드와 프랑스를 반반 섞어 놓은 모습이고, 스위스는 조금 더 엄격한 독일, 오스트리아는 조금 더 여유로운 독일의 모습인 듯 느껴진다. 내가 다녀 본 유럽에서 운전하기 가장 편한 곳은 스페인이었는데, 그 이유는 (아마도 다른 나라에 비해 부유하지 않아서인지) 고속도로에 차가 별로 없기 때문이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재미로 하는 이야기이다. 여기서 얘기한 나라별 운전문화는 상당 부분 편견과 고정관념, 그리고 성급한 일반화에 바탕을 두고 있다.
하지만 나라와 지역마다 나름대로의 문화가 생기고, 같은 나라와 지역에 사는 사람들은 같은 문화에 익숙해질 수밖에 없다. 한 문화권에 속한 사람들은 자신이 익숙하지 않은 다른 문화권에 대해 편견과 고정관념을 갖게 되고, 한두 가지 사례로 전체를 단정하려 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자신과 다른 성별이나 성적 정체성, 종교를 가진 사람들에 대하여도 편견이나 고정관념을 갖게 된다. 한번 그런 마음이 생긴 이후로는 보고 싶은 것만 보려고 해서 그러한 경향성은 더 강해진다. 어떤 한 집단에 속한 사람이 다른 집단에 속한 사람을 삐딱하게 보지 않기는 정말 쉽지 않고, 그것을 고치기는 더욱 어렵다. 내가 여기서 말한 것 역시 독일의 운전문화에 익숙해진 한 사람으로서 주위의 다른 나라들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떠드는 것인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