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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즐겨찾기 Feb 06. 2019

오늘은 당신의 생일입니다

독일에서 생일은 특별한 의미가 있다. 우리의 생일은?

아직 어학원에 다닐 때였다. 수업 중간의 쉬는 시간이었는데, 한 선생님이 여러 교실에 있는 학생들을 전부 복도로 불러냈다. 그녀는 한 손에는 조그만 생일 케이크를, 다른 손에는 영상 통화 중인 핸드폰을 들고 있었다. 핸드폰 속 화면에는 어학원의 다른 선생님 얼굴이 보였다. 영상 속 선생님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동료 선생님이 마련한 이벤트였다. 학생들은 복도에 모여 한 목소리로 생일 축하 노래를 불렀고, 영상 속 선생님은 울먹이며 감격스러워했다.     


생일을 축하해준다는 것이 좋은 일이긴 하지만 굳이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나 싶었다. 생일이라는 날이 30-40명이나 되는 학생들을 불러내어, 케이크와 함께 영상 통화까지 해가면서 축하할 일은 아니지 않은가. 흔한 것은 아니라도 1년마다 돌아오는 날인데. 게다가 생일을 맞은 선생님은 브라질에서 휴가를 즐기고 있었다. 먼 곳에서 조용히 휴가를 보내고 있는 사람의 생일은, 축하한다는 문자 메시지 정도로 충분하지 않은가. 그 선생님이 환갑이나 칠순을 맞이한 것도 아닌데 말이다.     

 

연말이 지나고 해가 바뀔 무렵 집주인 여자에게서 연락이 왔다. 나에게 독일 문화에 대하여 많은 것을 알게 해 준 그 사람이다. 그녀는 아이들 방 문에 걸려 있는 달력을 사진 찍어서 보내달라고 부탁했다.  


그전까지 그 달력을 제대로 본 적이 없었는데, 사진을 찍으면서 자세히 보니 그것은 사람들의 생일을 적어둔 달력이었다. 월 별로 생일인 사람들의 이름과 날짜가 적혀 있었다. 한 달에 적게는 4-5명 많게는 10명이 넘었고, 대략 70-80명의 생일이 기록되어 있었다. 집주인 여자는 지인들의 생일을 잊지 않기 위해 그것이 필요했던 것이다. 독일에서는 생일을 축하하는 것이 인간관계의 중요한 지표라고 한다.   

사람들의 생일을 기록해 두는 달력

생일이 무엇이 길래 그토록 열심히 챙기는 것일까. 나의 생일을 돌이켜 보면, 어렸을 때 가끔씩 친구들을 집으로 불러 생일잔치를 했고, 대학교 때까지만 해도 친한 사람들끼리 모여 술자리를 가졌던 것으로 기억한다. 일을 시작하고 결혼을 한 이후로는 가족들끼리 조촐하게 축하하는 것이 생일날의 풍경이 되었다. 내 생일을 매년 잊어버리지 않고 챙겨주는 사람은 10년 이상 함께 지내온 아내밖에 없다. 동생들은 물론 부모님조차 그냥 지나치고 넘어갈 때가 있는데, 하물며 친구들이야 오죽하겠는가. 정말 친한 한두 명은 모르고 지나친 경우 나중에 미안하다면서 축하를 해줬지만, 그렇지 않은 사이에서는 축하해주면 고마운 것이고 아니면 아쉬울 것도 없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부모님 생일을 잊지는 않았지만 동생들이나 장인, 장모님 생일은 모르고 넘어갈 때도 있었다. 친구들의 생일 역시 어쩌다가 생각나면 축하해주고 안 해주면 그만이었다. 잊는다고 해서 미안하지 않았고, 오히려 갑자기 생일을 축하하는 것이 어색한 경우도 있었다. 내가 매년 생일을 잊지 않고 챙겨주는 사람들이 몇 명이나 될까. 아마 10명도 되지 않을 것이다.     


독일에 온 이후 아이들은 학교와 어린이집에서 친구들의 생일 파티에 종종 초대받았다. 독일에서 생일은 의미가 큰 날이어서 초등학교 1학년만 되어도 굉장히 체계적으로 생일 파티가 진행된다. 생일 파티를 여는 아이는 손수 작성한 초대장을 친한 친구들에게 나눠준다. 초대장을 받은 아이는 생일 파티에 갈 것인지를 답해야 한다. 그래야 인원에 알맞게 계획을 세울 수 있다.      


파티에 초대받은 아이는 생일 선물을 준비해야 하는데, 때에 따라서는 선물이 이미 정해져 있다. 백화점에 가면 생일인 아이가 미리 골라 담아 놓은 선물상자가 있어서 그 상자에 있는 물건들 중 하나를 사주는 것이다. 선물의 가격이 적혀 있는 목록을 보고 적당하다고 생각하는 것을 구입하면 된다. 생일인 아이의 입장에서는 원치 않은 선물을 받지 않고 초대받은 입장에서는 필요한 선물을 주는 것이니 꽤 괜찮은 방법인 것 같다. 한 가지 문제라면 선물 받는 사람이 선물 가격을 알 수 있다는 것 정도다.     

백화점에 비치된 선물 상자들. 생일과 이름이 적혀 있는 상자에 들어있는 선물들 중 하나를 고르면 된다.

생일인 아이의 부모는 참석한 아이들을 위해 간식과 선물을 준비해야 한다. 간식은 대부분이 직접 만든 쿠키와 작은 케이크, 파스타 같은 음식이다. 선물은 사탕이나 젤리 같은 군것질거리를 비롯해 조그만 학용품과 장난감을 봉지에 담아 준다. 많은 비용이 드는 것은 아니지만 손수 만들고 일일이 포장을 해야 하는 것들이다. 생일 파티를 하기 위해서 부모들은 적당한 장소와 일정을 잡는 것부터 파티에서의 프로그램을 계획하는 것까지 많은 정성과 노력을 들여야 한다. 초대 해놓고 아이들끼리 놀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게임과 놀이를 할지도 준비해야 하는 것이다. 요즘의 한국 아이들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내가 어렸을 때의 생일 파티는 그렇지 않았다.   


독일인들이 이처럼 서로의 생일을 열심히 축하하고 아이들의 생일 파티에 정성을 다하는 것을 보면서 남사스럽다는 생각을 했었다. 아이들 생일잔치를 해주는 것이야 그럴 수 있다고 하더라도, 어른들의 생일까지 일일이 성실하게 챙겨야 하는 것은 의문이었다. 독일에서는 생일을 축하해주는 것이 가까운 관계의 척도이기는 하지만, 다 큰 어른들끼리 생일을 축하하면서 감격스러워하는 모습은 어쩐지 어색하고 쑥스럽게 느껴졌다. 한국에서 아버지와 장인어른의 생신을 축하할 때면 그분들은 언제나 말씀하셨다.

“나이 먹는 것도 서러운데, 무슨 생일이야.”     

나도 그랬다. 생일이 되면 왠지 기쁜 마음보다는 한 살 더 먹었구나, 참 시간 빠르구나, 하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하지만 독일 사람들이 서로의 생일을 축하하고, 생일을 맞은 사람들이 어느 때보다 행복해하는 것을 보면서 점차 생각이 바뀌었다.

‘저 사람들은 오늘만큼은 주인공이구나.’     


우리 인생의 주인공이 우리 자신이라고는 하지만, 우리가 주인공의 기분을 느끼는 날은 얼마나 될까. 나는 최근에 그런 기분을 느낀 적이 있는지 떠올려 봤지만 잘 기억나지 않는다. 과연 1년에 한 번은 있을까? 자신이 주인공이 아닌 것은 단지 심리적인 요인으로 인한 것이 아니다. 실제의 현실에서 우리가 주인공이 되기는 어렵다. 지구에는 잘나고 대단한 사람들이 너무 많고, 세상은 한 사람 한 사람 모두에게 관심을 쏟지 않는다. 자신이 인생의 주인공임을 절실히 느끼면서 사는 날은 극히 드물다. 아마 평생을 헤아려보아도 손꼽을 수 있을 정도일 것이다. 오히려 일상에서는 자신의 초라함과 미약함을 더 많이 느낀다. 우리는 주인공이 아닌 삶을 대신하여 드라마와 영화 속 주인공에 감정을 이입하고 유명인의 일거수일투족을 보면서 대리 만족한다.   


내가 내 인생의 주인공임을 절감한 때는 결혼식 날이었다. 모든 사람이 축하해주고 행복을 빌어주었다. 많은 사람들이 나와 아내를 위해 모였고, 우리만 바라보았다. 조금 쑥스러운 면이 없는 건 아니지만 행복했고, 적어도 그날만큼은 내가 주인공인 것이 틀림없었다. 그건 내가 아무리 못난 사람이라고 해도 상관없었다. 그날만은 나에게 주인공으로서의 권리가 있었다. 그래서 나는 한 번 더 결혼식을 하고 싶다는 생각을 가끔 한다. 일 년에 한 번 정도면 행복할 것 같다.     


결혼식이 아니어도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이 생일이다. 못나면 못난대로 잘나면 잘난 대로 1년에 한 번씩만 공평하게 누릴 수 있는 날이다. 누구나 주인공이 될 수 있는 날이다. 1년에 하루만이라도 자신이 주인공인 날이 있다면 좋지 않겠는가. 누군가 우리의 생일을 축하해 준다면 쑥스러움과 민망함은 잠시 접어 두자. 자격 없음을 생각하지 말자. 우리는 충분히 열심히 살았다. 그날만큼은 아무 거리낌 없이 사람들의 축하를 받으며 마음껏 즐거워하자. 나이만 먹어간다고 한탄할 것이 아니라, 한 해가 지나서 한 번 더 주인공이 될 수 있었음에 감사하자. 주인공인 자신에게 조그마한 선물이라도 준다면 기쁨은 더해질 것이다. 사실 생일 축하 파티는 아이들이 아니라 어른들에게 더 필요한 것인지도 모른다. 아이들은 이미 자기 인생의 주인공으로, 가족들의 주인공으로 살고 있으니까.

     

우리가 자신의 생일을 즐길 수 있는 마음도 중요하지만, 그만큼 축하해주는 사람이 많아야 의미가 있을 것이다. 혼자서 주인공이 될 수 있는 영화와 드라마는 없다. 서로가 서로를 주인공으로 만들어야 한다. 나는 나중에 한국으로 돌아가면 서로의 관객과 조연이 되기 위해 ‘생일 축하 계’ 모임을 만들어 볼 생각이다. 이 모임은 생일마다 만남을 가지기 위한 것이 아니다. 모임은 1년에 한두 번으로 족할 것이다. 다만 생일 때면 그 주인공에게 회원들 각자가 진심을 담아 오글거리는 축하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이 목적이다. 생일을 맞은 사람이 주인공임을 느낄 수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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