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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즐겨찾기 Feb 25. 2019

듣기만 6개월, 말하기 1년

아이들의 독일어 습득 과정으로 보는 외국어 교육.

 아내와 나는 우리의 선택에 따라 이곳에서 살고 있지만, 아이들은 영문도 모른 채 외국 생활을 하고 있다. 아이들은 이곳에 있는 것이 즐거울지, 지금 생활이 아이들에게 의미가 있을지, 의미가 있다면 어떤 의미가 있을지 궁금할 때가 많다. 해외에서의 장기간 체류를 염두에 두고 있는 사람이라면 비슷한 질문을 한 번씩은 했을 것이다.      

 외국 생활에 특히 문제가 되는 것은 언어이다. 외국어를 사용하지 않는다면 서울에서 광주로 이사를 가는 것과 광주에서 독일로 가는 것은 아이들에게 큰 차이가 없다. 새로운 장소에서 새로운 친구들과 선생님을 만나는 것은 마찬가지다. 아이들이 시청에 가서 거주자 등록을 하고 부동산을 돌아다니며 집을 구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아이들에게 달라지는 것은 어린이집뿐이다. 이처럼 외국어는 아이들이 해외 생활에 적응하는 데 가장 큰 어려움이지만, 반대로 외국어를 배우기 위해 해외로 가는 사람들도 많다. 아이들이 지난 1년 6개월 간 독일어를 습득한 과정을 보면서 외국어 공부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독일에 온 직후부터 아이들은 어린이집에서 사용하는 낯선 언어에 두려움을 느꼈다. 그나마 첫째는 적응력이 좋았는지 말이 통하지 않았음에도 어린이집을 좋아했지만, 둘째는 한 동안 어린이집 가기를 싫어해서 아침마다 고생을 했다. 하리보 젤리나 장난감을 사준다면서 달래야 했고, 울면서 안 가려고 할 때는 어쩔 수 없이 집에서 쉬기도 했다. 가기 싫어하는 아이를 억지로 어린이집 안으로 밀어 넣을 때면 미안하고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아이를 집에서 데리고 있는 것도 충분히 가능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어린이집 선생님들이 아이를 다정하게 타일러서 데리고 들어갔다. 시간이 지나 또래 친구들과 가까워지자 둘째 역시 어린이집을 좋아하게 되었다.


 아이들의 외국어는 생각만큼 빨리 늘지 않았다. 독일로 오기 전 어린아이들은 언어를 빠르게 배우니 걱정할 필요 없다는 말을 들었지만, 아이들이라고 해서 마법처럼 빠르게 외국어를 배우지는 못했다. 3-4개월쯤 지나면 독일어를 이해할 줄 알았는데, 전혀 그렇지 못했다. 아이들의 언어 능력과 연령에 따라 제각각이겠지만, 우리 아이들의 경우 6개월 정도 지나서야 한두 마디씩 독일어로 말을 했고, 1년쯤 지났을 때는 어렵지 않은 독일어를 듣고 이해하며 말하는 수준이 되었다. 다시 말하면, 1년쯤 지나야 만 외국어에 겨우 ‘익숙’해졌다고 할 수 있고, 이는 1년 만으로는 외국어를 습득하기에 충분하지 않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아이들이 외국어를 빨리 습득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아이들이라고 해서 언어의 마법사는 아니다.

 외국 어학 기관의 자료에 의하면 외국어 습득(Acquisition) 과정은 다음의 다섯 단계로 나뉜다고 한다. 단계별로 영어식 정식 명칭을 병기했고, 그 뒤에 적절하다고 생각하는 한국어 명칭을 임의로 덧붙였다.

* 1단계(Pre-production) : 침묵(모방) – 말하지 않는다(not speaking). 말하더라도(saying) 따라 하는 것(parroting) 일뿐이다.

* 2단계(Early-Production) : 발화 – 한 두 단어로 말한다. ‘예/아니오’ 식의 질문에 답할 수 있다.

* 3단계(Speech Emergence) : 간단한 대화 – 간단한 구절과 문장을 사용해서 의사소통한다.

* 4단계(Intermediate Fluency) : 중급의 유창함 – 말하거나 글을 쓸 때 복잡한 문장을 사용할 수 있고, 자신의 의견과 생각을 표현할 수 있다.

* 5단계(Advanced Fluency) : 상급의 유창함 – 모국어와 가까운 단계로, 외국어로 역사나 사회 같은 인문학을 연구할 수 있다. 보통 4-10년이 걸린다.     


 이러한 구분에 따르면 우리 아이들의 경우 2단계에 도달하는데 6개월, 3단계에 도달하는데 1년이 걸렸다고 할 수 있다. 첫째 아이의 경우 1년 6개월이 지난 현재 초등학교 1학년 수준임을 전제로 4단계로 향해가고 있는 것 같다. 나의 영어 말하기 실력은 3단계쯤인데, 영어로 고민하는 대부분의 한국인들이 나와 비슷한 단계에 머물러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듣기와 말하기에 관한 나의 독일어 실력은 아직 1-2단계이고, 읽기로만 따지면 3-4단계쯤 되는 것 같다.

    

 이러한 습득 과정은 외국에서 영어를 배우는 경우에도 적용할 수 있다. 다시 말해 1년의 기간은 ‘익숙’해지기에는 충분하지만 ‘능숙’해지기에는 부족한 시간이다. 실제로 그런 예를 보았다. 독일로 해외연수를 온 동료들 중에는 어린이집 대신 영어를 사용하는 국제 학교를 보내는 사람이 있었다. 그 아이들은 하루 종일 영어로 수업하는 환경에서 학교를 다녔다. 그 아이들은 우리 아이들과 마찬가지로 6개월이 지나서 영어로 ‘발화’했고, 1년이 지나서 ‘간단한 대화’를 할 수 있었다. 그 사람은 한국으로 돌아가면서 1년만 더 있으면 영어를 잘할 것 같다면서 아쉬워했다.     

 

 독일어는 영어보다 효용 가치가 떨어지기 때문에 이왕 이면 국제 학교를 보내서 영어를 배우게 하는 게 좋지 않을까 생각하는 사람이 많고, 나도 그런 고민을 했었다. 지금도 여전히 같은 고민을 하고 있다. 다른 것도 마찬가지지만 이 문제 역시 정답은 없는 것 같다. 내가 독일어를 고집한 이유는 어차피 영어는 나중에라도 배운다는 것과 독일어를 익힌 것이 영어를 배우는 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 생각한 것인데, 독일인들이 영어를 빨리 배운다는 말은 많이 들었으나 정확한 근거 자료는 찾지 못했다.     


 학습과 관련된 사교육이 거의 없는 독일이지만, 영어에 관해서만은 예외여서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전부터 일주일에 한 시간씩 다니는 영어 학원을 보내기도 한다. 아내와 나는 첫째 아이가 학교에 입학하기 전 간단한 영어 교육이라도 시킬까 싶어서 가까운 어학원을 찾아가 상담받은 적이 있다. 어학원은 만 3-5세, 5-7세와 8-10세 등으로 반이 나누어지며, 최소 4명 최대 8명으로 운영되었다. 1년을 한꺼번에 등록하면 한 달에 45유로, 6개월이면 한 달에 55유로이다. 국제 학교의 학비가 한 달에 최소 800유로에서 1,000유로를 넘기도 하는 것을 고려하면, 어학원 비용은 감당할 만한 수준이었다.      


 비용보다 궁금한 것은 배우는 내용이었다. 상담자의 말에 의하면, 독일의 어린이집에서 철자를 가르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어학원에서 역시 철저하게 말하기/듣기 위주로 교육이 진행되었다. 그는 영어로 보드게임을 하거나 블록을 쌓고 노래와 율동을 한다고 설명했다. 말하기/듣기를 할 때까지는 철자와 단어를 가르치지 않는다고 했다. 앞에서 말한 외국어 습득의 단계와 비교하면, 1, 2단계를 거친 다음 3단계에 이른 후 철자와 단어를 배우는 방식이었다. 사실 이러한 방식은 우리가 모국어를 습득하는 것과 동일한 과정을 따르는 것이다. 한국의 일부 영어 유치원에서는 단어와 철자, 쓰기를 집중적으로 배운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는데, 그것과는 천차만별이었다(아이들에게 쓰기가 무슨 소용인가?).     

출처 :  http://news.mk.co.kr/newsRead.php?year=2017&no=744457

 우리는 결국 어학원에 등록하지 않았다. 담당자의 말에 의하더라도 외국어를 배우는 것은 또래 집단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는다고 했는데,  어차피 비슷하게 영어를 못하는 아이들 사이에서 과연 얼마나 배울 수 있을지 의문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또 다른 이유는 아직 한국어를 제대로 읽고 쓰지도 못하는 상태에서 영어를 배우는 게 도움이 된다는 확신이 없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영어를 배우는 것보다 한글을 제대로 익히고 국어의 어휘와 독해 능력을 기르는 게 우선인 것 같았다.


 한편 첫째는 1학년 2학기가 되면서부터 초등학교에서 영어를 배우기 시작했다. 1학년부터 정규 교육 과정에 영어가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영어는 일주일에 두 시간씩 수업을 하고, 담임 선생님이 아니라 별도의 영어 담당 선생님이 가르친다. 영어 교재가 있기는 하지만, 노래와 시청각 자료를 통한 말하기/듣기 위주의 수업이다. 아이가 어떻게 영어를 배우는지 지켜보고 앞으로의 교육에 참고할 생각이다.     


 아이들의 독일어 실력이 한 단계, 한 단계 발전하는 것을 보면서 한 가지 생각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내가 만약 아이들처럼 독일 어린이집을 다녔다면 나 역시 독일어를 습득(Acquisition)할 수 있었으리라는 생각이었다. 상상만 해도 웃기긴 하지만 내가 아이들과 함께 어린이집에 가서 생활했다면 독일어를 잘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선생님들이 물건을 정리하지 않는 나에게 같은 말을 반복해주었다면, 이리 와 저리 가 같이 쉬운 말을 친구들과 계속 되풀이했다면 아이들 수준의 독일어 듣기와 말하기는 어렵지 않게 습득했을 것 같다. 아이들의 언어적 재능이 어른보다 더 뛰어난 것은 사실이겠지만, 상황에 맞는 쉬운 단어와 문장을 반복적으로 듣는 것이야말로 외국어를 배우는 지름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의 영어 말하기 실력이 좀처럼 3단계에서 4단계로 나아가지 못하는 것은 내가 영어를 습득하지 않고 처음부터 학습(Learning)했기 때문일 것이다. 내가 학창 시절에 배웠던 것과 다른 방법으로, 같은 노력과 시간을 들였다면 지금과는 상당히 다른 상황일 것이다. 아이들은 나와 같은 길을 걷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아니, 어쩌면 아이들이 어른이 되었을 쯤에는 인공지능이 동시통역을 해주어서 외국어 공부를 하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 참고자료

https://bilingualkidspot.com/2018/09/19/5-stages-of-second-language-acquisition/

http://www.everythingesl.net/inservices/language_stages.ph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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