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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즐겨찾기 Feb 18. 2019

한국과 독일의 글자 공부

한글을 익히지 않고 초등학교에 들어가면 어떻게 될까?

 독일에 있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한국으로 돌아간 이후를 걱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다른 무엇보다 독일과 우리나라의 교육 제도와 현실이 많이 다르기 때문에, 아이들이 우리나라의 학교생활에 잘 적응할 수 있을지가 걱정되었다. 아이들에게 한글과 수학을 가르치기 시작한 이유였다.


 첫째 아이는 독일에 왔을 때 한국 나이로 7살이었는데 한글을 떼지 못한 상태였다. 6살 중반 무렵부터 한글을 가르치려고 노력해봤지만 생각만큼 잘 되지 않았다. 나는 체계적으로 가르치는 능력이 부족했고, 아이는 배우려는 의지가 없었다. 다른 일과에 시간을 쏟다 보면 하루에 10분씩 공부하는 것도 건너뛰기 일쑤여서 아이의 한글 공부는 늘 제자리걸음이었다. 해가 바뀔 무렵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서 일주일에 한 번씩 오는 학습지를 시작했다. 선생님이 잘 가르쳐서인지, 시스템이 좋아서인지 아이의 한글 실력은 조금씩 늘었다. 엄마, 아빠와 공부할 때는 그렇게 몸을 비비 꼬면서 하기 싫어하던 아이가 선생님 앞에서는 똘망똘망 행동하는 것을 보면서 의아함을 느꼈다. 독일에 오기 전 아이는 아는 글자를 띄엄띄엄 읽는 정도가 되었다. 하지만 여전히 글자를 많이 헷갈려했고, 받침이 있는 글자는 잘 읽지 못했다.


 지금 첫째 아이는 한글을 곧잘 읽는다. 한국의 교과 과정에 맞춰 국어책을 보고 있는데, 줄줄 읽지는 못하더라도 천천히 또박또박 읽을 수는 있다. 맞춤법이 많이 틀리고 띄어쓰기는 엉망이지만 읽으면 무슨 뜻인지 알 수 있게 글을 쓴다. 작년 여름 첫째와 같은 나이의 한국 아이를 만난 적이 있었는데, 그 아이는 두껍고 그림이 별로 없는 책을 능숙하게 읽어나갔다. 한국에 있었으면 곧 2학년이 될 첫째 아이가 또래에 비해 한글 실력이 좋지는 않겠지만 하루하루 나아지고 있다. 독해능력은 한글실력과 비례하지 않는다는 것을 믿고 싶다.


 독일의 어린이집은 알파벳 철자를 가르치지 않았다. 학교에 가기 직전에 자기 이름 쓰는 방법만 가르쳐주었다. 첫째는 학교에 들어가서 한 글자씩 철자법을 배우기 시작했다. 의외였던 것은 알파벳 순서대로 배우는 것이 아니라 I, M, A, L... 이런 순서로 배웠다. 어떤 원리나 규칙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아이는 굉장히 빠르게 철자를 익혀나갔다. 아마도 소리와 글자를 연결시켜서 배우는 교수법(이른바 파닉스, Phonics)인 것 같았다. 아이가 독일어를 말할 수 있음을 전제로 각각의 발음이 어느 문자와 연결되는지를 배우고, 연속되는 문자의 발음을 조합해 모르는 단어의 발음을 구성하는 방식이다(위키백과 참조). 아이는 얼마 지나지 않아 처음 보는 독일어 단어들을 읽기 시작했다. 요즘에는 간단한 독일어 문장을 읽을 수 있다. 만약 아이가 한국에서 한글을 모른 채 초등학교에 입학했다면 글자를 익히는데 얼마나 걸렸을지, 과연 제대로 배울 수 있었을지 의문이 들었다.

독일 초등학교 철자책의 목차

 한글을 잘 모르는 것의 더 큰 문제는 국어가 아니라 수학이었다. 우리나라의 수학 교과서는 숫자만큼이나 글자가 많았다. 숫자나 기호를 익히는 것보다 문제를 읽고 이해하는 게 더 어려웠다. 수학적인 연산이나 추론 능력이 아니라 한글 독해 능력을 필요로 했다. 교과서는 아니지만 1학년 2학기 수학 학습서에 나오는 문제는 이런 식이었다.


“한 봉지에 10개씩 들어 있는 귤이 5 봉지 있습니다. 귤이 모두 90개가 되려면 10개씩 들어 있는 귤이 몇 봉지 더 있어야 할까요?”


 이것은 비교적 간단하다. 조금 더 어려운 문제를 보자.


“수철이는 구슬을 18개 가지고 있습니다. 윤지는 수철이보다 5개 적은 구슬을 가지고 있고, 현식이는 윤지보다 12개 많은 구슬을 가지고 있습니다. 현식이가 가지고 있는 구슬은 몇 개일까요?”


 어른들에게는 어렵지 않은 문제들이다. 하지만 1학년 아이들에게는 그렇지 않다. 차근차근 따져가며 읽어야 한다. 어른들 역시 빠른 속도로 읽으면서 문제를 풀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이 문제들은 1학년 2학기 초반의 교과 과정에 해당하는 것인데, 아이의 연산 능력과 관계없이 한글을 제대로 읽지 못하는 학생이 풀기에는 어려운 문제였다. 한글을 잘 읽는다고 하더라도 어느 정도의 독해 능력을 요구했다. 사실 이 문제들의 문장 구조는 비슷한 시기에 배우는 국어책의 문장보다 더 길고 복잡했다. 아이는 이런 문제들을 보면서 도무지 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한글을 익히지 못하면 수학을 배우기도 어려운 게 현실이었다.


 반면 독일의 초등학교 1학년 수학은 숫자와 그림과 기호가 대부분이었다. 10 이하 숫자의 더하기, 빼기를 계속해서 반복하고, 이를 바탕으로 추론이 이루어지는 방식이었다. 요즘 아이가 학교에서 하는 것은 3단 피라미드 모양의 숫자 칸 중 빈칸을 채우는 것이다. 한국식 수학 공부를 그렇게 싫어하던 아이가 독일 초등학교에서 가장 좋아하는 과목이 수학이라고 했다. 놀라울 따름이다.

독일의 수학책. 단순한 연산과 추론을 반복해서 연습한다.

 최근에는 한국 나이로 7살이 된 둘째에게 한글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아이가 얼마 전부터 1주일에 하루 한글학교에 다니기 시작했지만 조금 더 빨리 한글을 떼려는 욕심이었다. 처음에는 첫째 아이가 학습지를 하면서 배웠던 방식으로, 이른바 ‘통 글자 학습법’을 시도했다. 아이들에게 한글의 원리를 이해시키기는 어려우니 ‘가지’, ‘나무’와 같은 낱말이 적힌 카드를 이용해 단어 단위로 글자를 배우는 것이었다. 하지만 아이가 지겹고 힘들어해서 요즘에는 ㄱ, ㄴ, ㄷ과 같이 음소 단위로 글자를 익히는 방법을 시도 중이다. 앞에서 말한 발음 중심 어학 교수법(Phonics)이다.


 표음문자인 한글은 발음 중심 어학 공부에 가장 완벽한 문자이다. 문자 자체가 발음기관의 모양을 따라 만들었으니 당연한 것이다. 아이는 ‘ㅜ’를 읽으면서 입술을 내밀었고, ‘ㅡ’를 소리 내면서 입모양이 일자가 된다고 신기해했다. 첫째 아이는 통 글자로 한글을 익혀서인지, ‘을/를’이나 ‘체/헤’와 같이 비슷하게 생긴 글자를 아직도 구분하지 못할 때가 있다. 음소 단위로 글자를 배운다면 이런 일은 거의 없을 것이다. 둘째 아이와 공부를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아이가 어떻게 한글을 익혀 나갈지 궁금하다.


 아이들과 한글 공부를 하다 보면 가끔씩 회의가 들 때가 있다. 첫째야 한국에 있었어도 학교에 다닐 나이여서 교과 과정에 맞게 공부를 하는 게 당연하지만, 둘째는 벌써부터 한글을 가르쳐야 하는지 의문이었다. 첫째 역시 한국에 있을 때 비슷한 나이부터 한글 공부를 시작했는데, 그때에도 마찬가지로 이런 회의감을 느꼈다. 학교에 입학해서 한글을 배우면 늦는 것일까? 만약 한글을 배우지 않고 초등학교에 입학하면 책을 읽고 글을 쓰는 데 지장이 있을까?


 초등학교 1학년 국어 교과서를 보면 분명히 한 글자씩 한글을 배우는 과정이 나온다. 그러나 아내와 아내의 지인들의 말에 따르면 우리나라의 초등학교에서는 한글을 거의 가르치지 않거나 형식적으로 가르치고 넘어간다고 한다. 이미 모든 아이들이 한글을 알고 있어서 가르칠 필요가 없고, 선생님이 한글을 가르치면 학생들이 딴짓을 하기 때문이랬다. 이것이 실제 교육 현장의 현실인지는 잘 모르지만, 이런 이야기를 들을 때면 답답함을 느낀다. 그러면 차라리 한글을 교과서에서 빼고 초등학교 입학 전에 글자를 익힐 것을 의무화하면 되지 않을까. 어차피 모두 다 그렇게 하고 있는 게 현실이라면 말이다.


 한국 나이로 5-6살에 한글을 익혀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근거도 일리가 있다. 한글을 모르면 다른 것을 배울 수 없기 때문에 한글을 먼저 익혀야 한다는 것이다. 책을 읽으려면 당연히 글자를 알아야 하고, 앞에서 본 것처럼 수학 공부를 하기 위해서도 글자를 아는 것이 필수적이다. 결국 더 빨리 더 많이 배우려면 한글을 알아야 한다. 이것은 모든 선행학습의 근거이다.


 얼마 전 다른 아빠와 자녀들 교육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의 아이가 아직 어려서인지 그는 이렇게 말했다.

 “자녀 교육은 그다지 신경 쓰지 않을 것 같아요. 그냥 아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관찰하다가 필요한 지원을 해주려고 해요. 한글은 가르쳐보겠지만, 때가 되면 다 하지 않을까요? 그보다는 올바르게 살아가기 위한 준법정신과 도덕심, 건강하게 살기 위한 식생활과 운동을 가르치고 싶어요.”


 나는 이것이 대부분의 부모의 실제 마음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현실은 전혀 다르다. 얼마 전 영국의 한 교수가 “한국에서는 학력을 두고 군비 경쟁과 같은 끝없는 경쟁이 발생한다.”라면서 이로 인해 사교육에 너무 많은 시간과 돈을 투자하고, 여기서 실패한 사람은 ‘자기혐오’에 빠진다고 말했다.(#) 끊임없는 출혈 경쟁의 연속인 교육 현실은 집값이나 일자리만큼이나 중요한 문제지만 사람들은 그다지 관심이 없거나, 어쩔 수 없다고만 하는 듯해서 안타까울 따름이다.


# 출처 : http://news.donga.com/3/all/20190210/9404059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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