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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즐겨찾기 Feb 11. 2019

발레 하는 딸, 축구 안 하는 아들

아이들을 보면 현재의 내 모습뿐만 아니라 과거까지 비추어 볼 수 있다.

  초등학교에 들어간 딸아이에게 바이올린을 가르칠까 생각해서 근처의 음악 교육기관을 찾았다. 공공기관에서 운영하는 것으로 보이는 ‘클라라-슈만 뮤직 슐레(Clara-Schumann-Musikschule)'라는 곳이었다. 어떤 수업이 있고 비용이 얼마인지 상담하러 찾아간 것이었지만 생각과는 달랐다. 그곳에는 손님을 기다리는 사람도, 학원을 지키는 사람도 없었다. 이른 오후 시간이긴 했지만 학생들도 없고 선생님도 없었다. 어리둥절해서 잠시 서성이던 아내와 나는 입구 부근에 놓인 접수용 서류와 우편함을 발견했다. 서류를 작성해서 우편함에 넣으면 담당자가 일괄적으로 수거해서 확인하는 방식이었다. 아이의 의사도 확인해야 했으므로, 서류만 챙겨서 집으로 돌아갔다.   


 딸아이에게 바이올린을 해보겠냐고 물었더니, 아이는 바이올린은 물론이고 발레도 배우고 싶다고 했다. 독일에 온 뒤 딸아이가 무언가를 적극적으로 하려는 모습에 놀라움을 느낄 때가 많다. 겁도 많고 두려움과 부끄러움도 많은 아이가 어떤 순간에는 예기치 못한 당당함과 추진력을 보여준다. 처음 독일에 왔을 때도 그랬다. 독일어를 전혀 하지 못해서 어린이집에 다니는 것이 쉽지 않았을 텐데, 가기 싫다는 말을 한 번도 안 했다. 오히려 너무 재밌고 좋다는 것이다. 아내와 나는 첫째가 놀랍기도 하고 대견하기도 했다. 아이는 아내와 나의 유전자가 반반 섞인 존재임에도 때로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이질감을 발휘했다.    

 

 2-3주가 지나서 뮤직 슐레의 답장이 오긴 했지만, 결과적으로 딸아이는 바이올린을 배우지 못했다. 이미 6개월마다 이루어지는 등록이 끝나서 빈자리가 없다고 했다.


 다행스럽게도 발레는 할 수 있었다. 우리가 찾아간 발레학원에 마침 초등학교 1학년을 대상으로 한 수업이 생겼다. 어떤 발레단의 무용수가 직접 수업을 진행했고 학생 수는 5-7명 정도였다. 수업은 일주일에 한 시간, 비용은 한 달에 45유로였다. 나쁘지 않은 조건이었다. 사실 굉장히 만족스러웠다. 학원의 분위기며 선생님과 비용 모두 마음에 들었다. 아이 역시 그곳이 좋았는지 매일 가면 안 되냐고 물어볼 정도였다. 거기에는 일말의 의구심도 망설임도 없었다. 아이가 그렇게 좋아하는 모습에서 다시 한번 기특함과 낯섦을 느꼈다.

작고 아담한 2층 건물인 발레 교실의 모습

 그 무렵 둘째는 축구를 하고 싶어 했다. 어린이집 옆에 있던 축구장에서 사람들이 축구하는 모습을 지켜보더니, 직접 해보고 싶었던 것 같았다. 안 그래도 아이에게 축구를 시켜야겠다고 생각하고 있던 터라 다음날 아이를 데리고 축구 클럽을 찾았다.    

 

 축구 클럽에 등록하는 과정 역시 쉽지 않았다. 사무실은 문이 닫혀 있었고 운동장에서 수업만 진행되고 있었다. 코치로 보이는 사람을 찾아가서 물었더니, 자기는 등록을 담당하는 사람이 아니라 잘 모른다, 빈자리가 있는지 알아보겠다면서 다음 주에 자기에게 전화 달라, 고 말할 뿐이었다.


 다음 수요일 다시 축구 클럽을 찾았다. 담당자가 매주 수요일 오후 4시에서 5시까지만 접수를 받는다고 했다. 사무실 앞에는 아이와 나를 포함한 5-6명의 사람들이 담당자를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날 바로 등록할 수 없었다. 사진과 여권, 거주 확인증, 등록비용과 유니폼 값 60유로를 가져오라고 했다. 어쩔 수 없이 아들과 나는 다음 주 수요일에 다시 그곳을 찾아야만 했다. 그렇게 3번의 방문 끝에 축구 클럽에 등록할 수 있었다. - 참고로 교육비는 한 달에 12유로였다. 하루가 아니라 한 달에 12유로다. 한국에서는 얼마인지 정확히 모르지만 짐작했던 것보다 훨씬 저렴해서 놀랐다.

   

 등록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아들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원하던 축구를 마침내 할 수 있었음에도 얼굴이 어두웠다. 무슨 일인지 물었더니, 축구를 하기 싫다는 것이었다. 아니, 3번이나 같이 찾아가서 겨우 등록했는데 이제 와서 하기 싫다는 게 웬 말인가. 여러 차례 물어보아도 아이의 대답은 변함이 없었다. 갑자기 돌변한 태도가 터무니없었지만, 아이에게는 일주일만 생각해 보자고 대답했다.   

  

 결국 나는 다음 주 수요일에 다시 축구 클럽에 가서 아이의 등록을 취소하고 환불을 받았다. 4주 연속으로 축구 클럽을 찾은 셈이었다. 나와 아내는 아이의 생각을 돌려보려고 노력했지만 본인이 싫다는데 어쩔 수 없었다. 담당자는 내 앞에서 시원하게 등록 서류를 찢었버렸다.

축구장 한편에 있는 사무실이다. 일주일에 한 시간만 문을 연다.

 아내는 나와 단둘이 있을 때면 둘째를 이해할 수 없다고 말했다. 축구를 싫어하는 것도 아니면서 왜 축구 클럽에 안 가려고 하는지 모르겠다는 것이다. 아들이 용기가 없고 도전의식과 경쟁심이 약한 것이 실망스럽다고 말했다. 아이에 대한 기대 역시 조금 접었다고 했다. 첫째와 비교되어 더욱 그런 마음이 들었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이해가 됐다. 어떤 이유로 그랬는지 알 것 같았다. 어렸을 때의 나 역시 그런 모습을 보였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것이 용기나 도전의식, 경쟁심과 관계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만으로는 무언가를 단정할 수 없다. 아이가 능력을 발휘하기에 필요한 환경이 조성되지 않은 것뿐이다. 이런 말을 하면서 내 어린 시절 이야기를 꺼냈다. 나조차도 잊고 있었던 기억들이 새삼스럽게 하나 둘 떠올랐다. 이야기를 하면 할수록 더 많은 일들이 생각났다. 10년 넘게 함께 한 아내에게 처음 얘기한 일들이었고, 아내는 내가 그런 줄 전혀 몰랐다면서 놀라워했다. 둘째가 조금 이해된다고 했다.     


 독일에 처음 왔을 때 둘째가 어린이집에 가는 것을 싫어해서 한두 달 애를 먹은 적이 있었다. 이사를 해서 어린이집을 옮긴 다음에도 둘째는 한 동안 새로운 어린이집을 좋아하지 않았다. 독일어로 말하는 데 큰 지장이 없었음에도 그랬다. 지금도 여전히 둘째는 어린이집 가는 것을 좋아하지는 않지만 예전보다는 즐겁게 다니고 있다. 둘째는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는데 많은 시간이 필요한 것이다. 이것 역시 내 모습과 닮았다.


 자녀는 부모를 비추는 거울이라는 말도 있지만, 아이들을 보면 현재의 내 모습은 물론이고 과거의 모습까지 비추어 볼 수 있다. 아들인 둘째뿐만 아니라 딸인 첫째를 봐도 그렇다. 아이들이 즐거워하고 기쁨을 얻는 순간, 움츠려 들고 긴장을 하는 순간은 나를 많이 닮아 있다. 어떤 때에 자신의 능력을 마음껏 발휘하는지, 어떤 때에 과장된 몸짓과 행동으로 장난을 치는지 이해가 된다. 아이들에게서 나의 어린 시절 모습을 발견할 때면 내가 다시 아이가 된 것 같은 묘한 느낌이 들면서 나 스스로가 안쓰럽기도 하고 대견하기도 하다. 나도 저런 마음이었겠구나 싶어서 안쓰럽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잘 커서 대견했다. 아이들 역시 어렸을 때의 내가 그랬던 것처럼 여러 가지 감정들을 느끼고 경험하면서 자라나는구나.

  

 그뿐만이 아니다. 아이들에게서는 부모님의 모습까지 보인다. 딸아이가 두려움을 느끼면서도(그렇다. 두려움이 없는 것이 아니다) 서슴없이 새로운 사람들과 어울리는 모습을 보면 어머니가 보인다. 아들이 무언가에 집중하면서 앉아 있는 뒷모습은 아버지의 모습과 꼭 닮았고, 그것은 나의 뒷모습이기도 하다. 아이들을 키우다 보면, 좋든 싫든, 원했든 원치 않았든 부모님과 나와 아이들이 연결되어 있다는 느낌이 강하게 든다. 나는 가끔 내가 닮고 싶지 않았던 부모님의 모습까지 닮았음을 발견하는데, 아이들 역시 아이들에게 물려주고 싶지 않은 내 모습을 닮았음을 보고는 흠칫 놀란다.


 아이들과 함께 붙어 지낸 지 1년 7개월이 되었다. 이곳에는 아는 사람이 거의 없으니 가족들끼리 똘똘 뭉쳐서 지내고 있다. 생활이 단조롭고 지치는 면도 있지만, 아이들이 자라나는 모습을 매일 가까이서 지켜볼 수 있는 것만으로도 다시는 오지 않을 시간이다. 아이들이 때로는 나와 닮은 모습으로 때로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자신들만의 고유한 인격과 기호를 발전시켜 나가는 것을 볼 때면, 그들이 아무리 어리다고 하더라도 한 명의 인간이라는 사실을 실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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